비밀이 많은 사람

그거 알아? 나는 이 한마디를 하기까지 보통 2시간이 걸린다는 거.

by 지안
Jeune Fille Près D’une Fontaine (1885)-Pierre-Auguste Renoir.jpg Jeune Fille Près D’une Fontaine (1885) | Pierre-Auguste Renoir


“생일 축하해.”


그거 알아?

나는 이 한마디를 하기까지 2시간이 걸린다는 거.

말이 느려서도 아니고, 딴짓을 하다가 까먹어서도 아니야.


네가 세상에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나의 소중한 사람이 되어줘서 고맙다고.

너에게 하고 싶은 말과

어울리는 선물을 찾는 데에 시간을 오래 쓰곤 해.


나를 생각해서 고른 선물은 티가 나더라.

선물과 함께 건네는 말에 고민의 시간이 묻어있어서,

그 시간을 오래 끌어안고 싶어 지더라고.


사진이 취미인 나에게 필름 카메라를 선물하며

‘언니의 시선으로 본 예쁜 사진들을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퇴사 선물로 책을 한 권 건네주며

‘상처보다 크고 아픔보다 강한’이라는 소제목에 내가 떠올랐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이 함께 보내준 고민의 시간을 꼭 끌어안았어.


그래서 나도,

너에게 그런 시간을 함께 선물하는 사람이고 싶었어.


그렇지만 이 선물을 고르며 너를 얼마나 오래,

깊이 생각했는지 몰라줘도 괜찮아.

사실 생일은 핑계거든.

너에게 고마웠던 마음을

생일을 핑계로 조금 당당히 전하는 것뿐이야.


그래서 더 신중하게 골랐어.

내가 너를 아는 만큼, 네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주고 싶어서

쇼핑사이트를 시도 때도 없이 들어갔다 나왔어.


그러다 보니까 나는 느린 사람이 되더라.

사실 2시간이 넘게 걸릴 때도 많아.

이걸 좋아할까, 저걸 좋아할까 며칠을 고민하느라

생일이 지나버린 적도 있었지.

너의 생일을 몰라서 그랬던 게 아닌데 말이야.

내가 빠른 사람이었다면

내 할 일도 챙기면서 너의 생일도 제때 챙길 수 있었을 텐데.

나 참 유난이다, 그치?



사실, 이건 너도 눈치챘을 거 같은데.

나는 받기만 하는 일이 너무 어려워.

선물이든, 마음이든, 말이든.

내가 받은 게 뭐든지, 어떻게든 다시 돌려주고 싶어.


네가 준 따뜻함이

장작 속에서 방금 꺼낸 고구마처럼

가만히 쥐고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자주 안절부절못해지고는 해.


그래서 더 웃기지.

나는 뜨거운 고구마를 손에 쥐고 있지 못하면서,

너는 내가 준 고구마를 쥐고 있기를 바라는 게 말이야.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더라.

내 마음을 그냥 받아주길 바라는 것도,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도 내 욕심이라고.

너를 위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쩌면,

다 나를 위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그걸 깨닫는 순간,

마음을 꺼내는 일이 조심스러워졌어.



내가 언제부터 욕심쟁이가 되었을까 떠올려보면,

고등학생 때부터였던 거 같아.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적고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어.

아이스크림 막대에 머리도 만들어주고, 눈도 붙이면서

내 분신을 만들듯 마음대로 꾸미는 활동이었는데.

그 막대에 적은 한 문장이 아직도 문신처럼 새겨져 있나 봐.


‘나는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다.’


곰곰이 생각해서 적은 이 문장을,

친구들 앞에서 읽으며 조금 머뭇거렸던 기억이 나.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부끄럽더라.


근데, 나중에 한 친구가 내 발표를 듣고

지안이는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며 나에게 말해주는데, 가슴이 두근거렸어.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나보다 나를 믿어준 친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는지,

어린 시절의 다짐을 지키고 싶었는지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나는 그동안 누군가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기꺼이 달려가는 사람이 되려고 많이 애썼던 거 같아.


근데 사람 일이 뜻대로 되지만은 않더라.

그 과정에서 나를 잃기도 하고,

오히려 지키고 싶었던 사람을 잃기도 해서

속상한 날도 많았어.


그럼에도, 내가 너의 하루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면

나는 오래도록 이 마음을 지켜보려고 해.

나 정말 이기적이다, 그치?



이건 너도 분명히 알 거야.

내가 편지 쓰는 걸 좋아한다는 거.

사실, 받는 것도 좋아하는데 쓰는 일이 조금 더 많은 거 같아.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도 맞고,

말주변이 없어서 글자로 내 마음을 말하는 게 더 편해서도 맞아.


그래서 때로는 편지도 내 욕심이라고 생각해.

이걸 읽는 동안 너는 나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거든.

편지를 읽으며 온통 내 생각뿐이길 바라는 나는,

편지 써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너를 보며 머쓱해하곤 해.


그래도, 그때만큼은 나를 생각해 주라.

나는 욕심쟁이라

편지 읽는 시간만큼은

네 시간이 내 것이었으면 해.

너에게 마음을 전하는 날까지의 나의 시간은,

늘 너의 것이 되곤 하거든.


하지만, 이건 나 혼자만 알고 있을게.

내 마음을 모두 꺼내버리면, 그 인연은 오래가지 않더라.

그러니, 너에게는 내가 가진 사랑의 일부만 닿기를 바라.

너와 오래 함께하고 싶은 나만 아는 비밀이야.


이런 욕심쟁이 느림보여도 괜찮다면,

나와 오래 함께해주지 않을래?





내가 사랑한 사람들에게,

지안으로부터.






지안

사람과 사랑을 탐구하며 <우리는, 사랑으로>라는 중제목 아래 여섯 편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

공간 사계절에 모인 다섯 작가가 귀촌·여행·책방·음식·관계를 솔직하게 기록한 5인 5색 에세이집입니다.

본 도서에서 재미와 감동, 따듯한 통찰이 담긴 다른 챕터들도 함께 만나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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