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라는 이름이 적힌 테이프를 몇 번이고 되감았다.
열 살쯤이었을까.
부모님이 맞벌이여서 집에는 늘 동생과 나뿐이었다.
심심했다. 방학이면 하루 종일 심심했다.
게임을 하다가, 소꿉놀이를 하다가, 파스텔로 그림을 그리다가, 색종이를 접다가.
이것저것 하면서 제풀에 지쳤는데도 여전히 심심한 날이면,
집에 있는 카세트 플레이어로 테이프를 하나 틀었다.
가사가 없는 노래. 그러니까,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모차르트나 비발디의 음악이었을 테지.
산 위에 있는 집이라 여름인데도 조금은 선선해서,
거실 바닥에 누워있으면 선풍기로도 괜찮았다.
창밖으로 살짝 보이는 파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피아노나 바이올린 연주 소리를 들었던 순간이 종종 생각난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오실 부모님을 기다리며 아무 걱정 없었던 그때가 그리운 탓일까.
나는 카세트 플레이어를 버리지 못했다.
이제는 심심하지도 않고, 해야 할 일도 많은데도
추억이라는 이름이 적힌 테이프를 몇 번이고 되감았다.
테이프가 고장이라도 나면 어쩔 수 없이 놓아줄 텐데.
내 추억 테이프는 얼마나 튼튼한지.
늘어지지도 않아서 시간이 날 때마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좋았던 기억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동생과 주먹밥을 만들어 먹고 물풍선을 터뜨리는 게임을 하며 부모님을 기다리던 여름방학.
칼국수를 만들어 주겠다며 열심히 밀가루를 반죽하는 아빠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일요일 아침.
시골집 마루에서 송편을 빚으며
콩 송편보다 깨 송편이 들어간 게 더 좋다고 투정 부리던 햇볕 따스한 어느 가을 오후.
이런 추억은 쌓이고 쌓여서,
내가 가지고 있는 카세트테이프만 벌써 한 상자다.
과거의 것은 과거에 두어야 앞으로 나아갈 텐데,
나는 오래도록 이 테이프들을 끌어안고 놓지 못했다.
효율을 따진다면 나는,
효율적인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랑은 효율과 거리가 멀다. 내가 한 사랑은 그랬다.
보고 싶은 마음에 온종일 상대를 생각하는 것.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과 시시콜콜 하루를 나누는 것.
기차역까지 데리러 가고, 데려다주는 것.
온통 비효율적인 일들뿐이었다.
이제는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애초부터 효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있다. 시간이 그렇다.
1초가 60번이 지나 1분이 되고, 1분이 60번이 지나 1시간이 된다.
그렇게 24시간을 보내고 나면 하루가 지나간다.
그동안 나는 그 시간 대부분을 과거의 사랑을 떠올리는 데 썼다.
왜 나는 이미 지나버린 것들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붙잡고 놓아주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오래 궁금해했다.
몇 개의 테이프를 돌려 듣다가 깨달았다.
그냥,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지나버린 것들을 오래 붙잡아두고 싶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사람.
반복해서 재생하고 싶은 추억 테이프를
꾸준히 만들고 싶은 사람.
나의 생은 추억과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추억을 떠올리고, 또 새로운 추억을 만드는 데 쓸 것이다.
사랑을 생각하며 사는 삶,
사랑에 효율을 따지지 않는 삶.
좋은 추억은 자주 되감고,
아픈 추억은 빨리 감기를 누르면서.
추억을 몇 번이고 되감아도
늘어지지 않는 테이프처럼,
사랑이 가득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지안
사람과 사랑을 탐구하며 <우리는, 사랑으로>라는 중제목 아래 여섯 편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
공간 사계절에 모인 다섯 작가가 귀촌·여행·책방·음식·관계를 솔직하게 기록한 5인 5색 에세이집입니다.
본 도서에서 재미와 감동, 따듯한 통찰이 담긴 다른 챕터들도 함께 만나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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