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어쩌면 유유자적한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릴 때부터 꿈이 없었다. 어른들은 큰 꿈을 가져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그럼 작은 꿈을 가지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 못 되는지, 모든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어른들에게 묻고 싶었지만, 그들도 잘 모르는 것 같아 물음표로 남겨뒀다.
7살 때 유치원에서 꿈을 적는 시간이 있었다. 빈칸이 허용되는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어떻게든 채우려고 고민했다. 꿀밤 때리기가 허용되던 시절, 나는 집과 유치원에서 종종 꿀밤을 맞았다. 나에게 꿀밤을 때리는 어른들은 “너 정말 머리가 단단하구나” 하며 자기 손을 어루만졌다. ‘아, 나는 머리가 단단하구나. 그럼 박치기 선수가 되면 좋겠다!’ 나의 첫 꿈은 박치기 선수였다. 하지만 박치기 선수는 꿈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 이후 나는 장래 희망 적는 칸에 박치기 선수 대신 간호사, 선생님을 적었다. 어른들은 내 장래 희망을 보고 현명한 선택이라며 칭찬했다. 그렇게 나는 초, 중, 고를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장래를 희망했다. 대학 역시 취업이 보장되는 아동복지학과에 입학했다.
아동복지학과 입학 후 사회복지관 봉사활동과 어린이집 수업 참관을 다녔다. 봉사활동과 어린이집 수업 참관을 다닐수록 사회복지사와 어린이집 교사는 나와 맞지 않다는 사실이 뚜렷해졌다. 전공이 안 맞으니 전과, 편입, 자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지만 나는 휴학을 했다. 휴학 후 카페에서 일했다.
주중에는 프랜차이즈점 카페에서 낮 12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인 카페에서 6시 30분부터 11시까지 일했다. 주말에는 오후 4시부터 11시까지 개인 카페에서 일했다. 나의 시간은 대부분 카페에서 보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음료를 2/3 마시고 맛이 이상하다며 새 음료로 바꿔 달라는 사람, 딸기 씨 빼달라고 요구하는 사람, 성희롱을 유머로 생각하는 사람 등 이상한 사람이 많았다. 반대로 나에게 좋은 영향을 준 사람들도 많았다.
개인 카페에서 내 앞 시간에 근무하시는 분은 내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으셨다. 본업은 프리랜서 그림 작가였다. 그분이 말하길 작업에만 몰두하면 오히려 진도가 안 나가고 생활 루틴이 망가진다고 했다. 또 불안정한 프리랜서 수입에 작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있으면 덜 불안해진다 했다. 나이가 많아도 카페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카페 손님 중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학 전공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직업이 한 가지 이상인 사람이 많았다. 적게 일하고 자기 시간을 많이 가지는 사람, 낮과 밤에 상반되는 일을 하는 사람,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 내가 알고 있던 어른들과는 달랐다. 넋두리보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 또는 지금 하는 일의 방향에 대해 말했다. 돈 이야기 보다 자신의 취향과 가치관에 대해 말하기를 더 좋아했다.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는 쉬운 단어와 재밌는 예시로 설명해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들보다 어리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카페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나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 다양한 삶을 경험할 수 있었다. 사회가 정해 놓은 생애주기별에 맞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지만, 이 고정관념이 무너졌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삶. 박치기 선수보다 말이 안 되는 꿈이다. 조금 다행인 건 유치원생 때는 내 삶에 선택권이 없지만, 지금은 선택과 책임 모두 나에게 있다.
여전히 내 꿈은 모호하다. 머리가 단단해 박치기 선수를 꿈으로 정한 것처럼 지금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걱정과 불안이 많은 내가 구체적인 계획 없이 살아가는 방식이 종종 기이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걱정과 불안으로 만든 줄에 걸려 강물에 빠진다. 나락이라 생각했던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 보면 새로운 곳에 도착해 있다. 그리고 알게 된다. 이곳이 내가 바라던 곳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