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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지 Jul 02. 2018

내가 하는 말은 나를 닮았다

그렇게 말하다 보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고 그런 사람이 된다.


지난해 지면에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라는 책의 리뷰를 쓴 적 있다. 부제가 가리키는 그대로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을 모아둔 책이다. 이를 테면 핀란드에는 ‘순록 한 마리가 쉬지 않고 단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뜻하는 ‘포론쿠세마(Poronkusema)’란 말이 있다. 우리에게는 없는 단어다. 반면 한국어에만 있는 단어, 눈치(Nunchi)도 나온다. “눈에 띄지 않게 다른 이의 기분을 잘 알아채는 미묘한 기술.” 


어떤 단어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핀란드 사람들이 거리 감각을 포론쿠세마로 셈할 때 우리는 그럴 수 없고, 반면 ‘그는 눈치가 없어’라는 말을 우리가 외국인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2010년 12월,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인터넷 판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형성한다(The language we speak shapes how we think)”라는 명제를 둘러싸고 스탠퍼드대 심리학과의 레라 보로디츠스키와 펜실베이니아대 언어학과의 마크 리버만이 열띤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열흘 가량 진행된 논쟁은 더 설득력 있는 쪽을 택하는 독자 투표로 결론을 맺었는데, 논쟁의 승자는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언어 사용방식이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가 많다”고 주장한 보로디츠스키였다. 이런 재미없는 얘기를 꺼낸 건, ‘눈치’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덜 쭈구리가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은 아니고(물론 아예 안 한 건 아닙니다) 요즘 들어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나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겠구나,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건 오래 들어온 흔한 말이지만, 나를 드러내기까지 한다는 그 말을 생각보다 우리는 가벼이 여긴다. 새겨지는 글이 아니라 휘발되는 말이라서일까. 실수는 금방 덮이고, 별 뜻이 없었다고 하거나 남들도 쓰기에 말해본 것뿐이라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정말 그만일까?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을 조금씩 닮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예전에 “~해줄게”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쓰는 사람을 만난 적 있다. 내가 기다려줄게. 내가 봐줄게. 내가 해결해줄게.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마치 ‘좋아해’가 아니라 ‘좋아해줄게’라는 말을 매일 듣는 기분이었다. “기다리는 거면 기다리고, 기다려주는 거면 기다리지 마. 그게 왜 해주는 거야, 그냥 하는 거지.” 나중엔 그렇게 얘기하고 말았다. 해줄게, 라는 말은 정말 해주는 상황에서만 쓸 수 있는 말 같은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쓴다는 게 의아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을 닮은 사람이기도 했다. 

선의를 가진 사람, 그 선의를 늘 ‘베푼다고’ 여기는 사람. 


그런 말은 실제로 우리 관계의 복잡성을 지우고 그와 나를 다만 주고/받는 쪽으로, 의지가 되고/기대는 쪽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 후로 사람을 대할 때 “해줄게”라는 말을 조심하게 되었다. 상대방이 먼저 청한 적 없는 것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면서, 해준다고 말하거나 생각하게 될까봐 신경 쓰였던 탓이다. 



별 거 아닌 듯 쓰는 말이 결국 우리의 사고를 조금씩 물들여 놓는다. 

그렇게 말하다 보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고, 그런 사람이 된다.




 “~한 것 같아”라는 말을 자주 쓰는 사람이 좀처럼 자기 의견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처럼. ‘다르다’와 ‘틀리다’를 자꾸 혼용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것을 은연중에 틀리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처럼. ‘그렇게 따지면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싶다면, 맞다. 무슨 말을 않고 생각해보는 게 낫다. 해도 되는, 옳은 말인가? 


언어에 대한 고민은 지금 당장, 내가 습관적으로 쓰는 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칼퇴근이 아니라 그냥 퇴근이다. 야근이 아니라 초과근무다. 몸값이라는 말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무서운 말이다. 



책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에서 김하나 작가는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어떤 식으로 프레이밍(framing)하는지 보여주며 위와 같이 말한다. 밑줄 긋고 읽었으면서 여전히 칼퇴! 를 외치고 퇴근하는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세상엔 그렇게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말이 정말 많다. ‘착한 몸매’라는 말은 대체 누가 규정하는 무슨 착함인지, 중2병, 급식충이라는 말이 세대 갈등을 부추기는 용어는 아닌지, ‘짱깨’라는 말이 음식 주문할 때 웃자고 쓰는 말이 되어서는 왜 안 되는지. 


모르고서 쓰는 말,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쓰는 말,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 써도 괜찮다고 여기는 말. 그런 말들이 점점 우리 사고를 물들인다. 이 정도는 말해도 된다거나, 실제로 그렇게 느껴버리게 만든다. 내가 그런 말을 닮고 싶었던 적 없었더라도, 나의 표정이 되고 인상이 된다. 



얼마 전 말을 잘못해서 뒤늦게 사과할 일이 있었다. 농담이 농담을 낳아서 농담을 자꾸 하려다 결국. 의도가 어찌 됐든 그런 맘이 아니었든 말든,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다면 그냥 상처가 될 말을 한 거다. 그런 말을 하는 내가 나인 거겠지. 내가 하는 말이 나를 닮는 거라면, 내가 내 말을 닮아가는 거라면, 자세를 고쳐 앉고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야 하는 건 그래서다.




Illustrator 키미앤일이

Writer 김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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