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하고 싶었던 나에게

나쁜 페미니스트 / 록산 게이

by 프롬

읽고 싶은 마음 반 읽고 싶지 않은 마음 반, 망설여졌다. 친구에게 물었다. "어떤 책이야? 읽을 만 할까? 학술적인 내용? 역사?" <나쁜 페미니스트>를 펴 들기까지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최근 몇 년 사이 페미니즘이 중요한 사회 이슈로 떠올랐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멀리하고 있었다. 인정하겠다. 나는 치사하고 얄미운 방관자 역할을 선택한 것이다. 급격히 부상하는 여성 인권 운동으로 사회 제도와 인식이 개선되어 나에게도 혜택이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진 않았다. 마음으로 응원했다고 말하는 것도 양심에 찔린다. 그냥 진취적인 누군가가 계속해서 우리의 권리를 이야기하고 싸워 줬으면 했다.


BOK00029041114YE.jpg 출처 : 다음 책


페미니즘이란 사실 무척 단순하다. 인간은 평등하다. 고로 남성과 여성도 평등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 이게 전부다.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페미니스트’란 수식어는 이렇게 무거워져 버린걸까.


내가 페미니즘을 멀리하고 싶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아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모르고 사는 것이 편할 것 같았다. 나는 회사를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며 사회 생활을 해야 한다. TV를 보고 인터넷 기사를 읽고 영화를 보러 다녀야 한다. 그 모든 생활의 영역에 여성 혐오적인 표현과 암시가 깃들어 있다. 인식하면 불편해 진다. 그냥 사는 것도 힘들고 피곤한데 페미니즘까지 신경쓰고 싶지가 않다. 바깥 세계만 문제가 아니다. 페미니즘에 다가가려면 내 자신 역시 검열해야 한다.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에 혹여 성차별적인 뉘앙스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자꾸 생각해야 하는 거다.


그리하여 둘째, 나는 훌륭한 페미니스트가 될 자신이 없었다. 결국 자기 모순에 부딪히게 될 터였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내가 즐겨 듣는 음악에 여성 혐오적 표현이 녹아들어 있다. 나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가 좋고, 가정 폭력범이라는 조니 뎁이 나오는 영화를 굳이 개봉일에 맞추어 찾아 보는 사람이다. 엄격한 페미니스트가 되어 검열해가기 시작하면 세상에 맘 편히 즐길 거리를 찾기 힘들 것이었다. 페미니즘이란 거창한 가치를 주장하기엔 나는 너무 가볍고 부족한 사람 같았다. 나 같은 사람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면 설득력 있을리가 없잖아.



65b1ae4b5c831758b5ed12a91a5220325d616cf1_2880x1620.jpg 출처 : TED.com


혹시 나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쁜 페미니스트>를 기꺼이 권해드린다. <나쁜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 앞에 작아져 있던 나에게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부족해도 상관없다고 말해주는 책이다. 록산 게이는 '페미니즘'이란 단어에 매달린 무거운 추를 끊어낸다. 해방이다. 이 유쾌하고 신랄한 글을 읽어 나가며 나는 자꾸 울컥했다. 특정 대목이 아니었다. 그녀는 페미니즘이란 거대 담론에 얽매여 가라앉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자유로워도 돼. 그렇게 말하는 듯한 그녀의 글 속에서 나는 외려 페미니즘과 멀리 하고자 했던 내 자신이 얼마나 억압되어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사실 스스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가 헌법으로 합의한 사회 안에서 당연하다. 페미니즘을 수호하기 위해 우리는 흠 하나 없는 이상적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곤 한다. 그러나 증명해야 하는 쪽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여성이 남성과 평등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야말로 증명의 의무를 진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는 그저 편안하게 평등을 주장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 록산 게이가 말하는 '나쁜 페미니스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기를 요구한다. 내 스스로가 완벽한 페미니스트는 아닐 지언정 사회에서, 내 주위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출발이다. 록산 게이는 다양한 음악, 영화, 드라마, 책을 끌어와 페미니즘 이슈를 이야기한다. 자신이 실제로 겪어내야 했던 경험, 사회에서 벌어졌던 믿고 싶지 않은 사건도 이야기한다.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쉽지만 그 안에 여성에 대한 편견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개중 어떤 드라마는 재밌고 어떤 음악은 중독성이 강해 자꾸 흥얼거리게 된다. 그럼에도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아는 것, 그리하여 세상에 잘못되었다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록산 게이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있는 일이다.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여성 문제 뿐만 아니라 인종 문제도 중요한 비중으로 다룬다. 페미니즘 이슈와 관련된 파트를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읽었던 나는 그녀가 흑인으로서, 이민자로서 느낀 인종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담담하게 읽었다. 단일한 인종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성장하고 자란 나에게 인종 차별은 크게 와 닿는 부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조금 시니컬해지기도 했다. 그녀가 언급하고 있는 영화들 중엔 내가 무척 감동적으로, 혹은 재미있게 본 작품(<헬프>, <노예 12년>, <장고 : 분노의 추적자> 등)도 있었다. 이 영화들에서 묘사되는 흑인 캐릭터에 대해 비평하는 록산 게이를 보며 어느 정도는 공감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너무 꼬아보는거 아닌가, 이렇게까지 민감할 필요가 있나, 생각했다. 그러다 뜨끔했다. 바로 이런 태도가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일군의 남성들이 보여 온 모습 아니었던가. 타인의 입장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결론은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이 무엇인지, 그들이 마주해야 하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 서로가 표현하지 않으면 알 길이 없다. 왜 그 음악이, 그 영화가, 그 기사가 잘못되었는지 이야기해야 하고 들어야 한다. 그 과정이 너와 나를 조금 불편하게 할지도 모른다.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것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하는 평등이 옳은 가치라면 그래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래서 나도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을 조금 덜 두려워하기로 했다.


나는 여성으로서 실패하고 있다. 페미니스트로도 실패하고 있다. 이런 내가 멋대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고 다니다니 진정 훌륭한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죄송스럽다. 내가 페미니스트라면 아마 나쁜 페미니스트일 것이다. 나는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인간이다. 나는 페미니즘에 여러 가지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적어도 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페미니즘에 대한 개념이 흐트러지고 있다면 내 잘못이 맞다.

(중략)

나쁜 페미니스트는 내가 페미니스트이자 솔직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다. 그래서 나는 쓴다. 트위터에 나를 화나게 만드는 것과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모든 사소한 것들을 다 쓴다. 블로그에 내가 요리한 음식을 올린다.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이렇게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어 세상에 나가고 싶고, 이렇게 하면서 더 좋은 여성이 되고 싶다. 나의 현재와 과거를 솔직하게 내보이고 내가 어디에서 비틀거렸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전부 다 털어놓고 싶다.

(중략)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

-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나쁜 페미니스트 : 두 번째 이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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