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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Jun 30. 2017

낯선 당신과 다른 내가 닮아있다는 것

쇼코의 미소 / 최은영

아마 출근 준비를 하던 중이었던 것 같다. 핸드폰으로 팟캐스트를 틀어 침대 위에 던져 놓은 뒤 바쁘게 준비하는데 여리고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간책방에서 김중혁 작가가 다른 작가를 초대하여 이야기하는 코너였다. 나는 '작가님'이란 분들은 연륜이 느껴지는 중저음의 나지막한 목소리일거라고, 그런 교수님같은 목소리가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나보다. 그런데 팟캐스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학생의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울리는 보드라움. 뭔가 신기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어리고 여린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김중혁 작가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직접 작품을 낭독해주는 시간이 왔다. 그녀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쇼코의 미소>라지만 작가에겐 자신의 모든 작품이 소중한지라 조금 덜 유명한 작품을 읽어주겠다 하였다. 함께 동아리를 했던 선배를 추억하며 러시아로 떠난 한 여성의 이야기였다. 듣다보니 오랜만에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는 곧 허겁지겁 집을 나서야 했고 버스에 올라타 현실에 내려야 했다. 그렇게 그날 아침은 흘러가 버렸다.


정확한 제목과 내용은 이내 잊혀졌지만 작가의 목소리와 그 이야기 속 선배의 이미지만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우연히 <쇼코의 미소> 표지를 보게 됐다. 아, 그 팟캐스트. 아, 그날 아침. 그러고보니 이름도 까먹었더라. 최은영 작가였구나. 조심스레 자신의 글을 읽어나가던 목소리가 참 좋았는데. 선배에 대한 묘사에 이상하게 내 모습이 겹쳐보여 마음이 가기도 했었고. 책과도 인연이란 게 있나보다. 갑자기 그때 내 마음에 들었던 그 구절을 꼭 찾아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쇼코의 미소>와 정식으로 마주했다.




출처 : 다음 책


<쇼코의 미소>는 7개의 중단편 소설을 엮은 최은영 작가의 데뷔작이다. 작가에게 젊은 작가상을 안긴 <쇼코의 미소>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작품들을 찬찬히 읽어나가다 보면 화려하거나 강렬하진 않지만 어쩐지 깊은 울림을 남기는 담담한 그녀의 문체에 빠져 들게 된다.


각기 다른 작품들이지만 이들은 어딘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한다. 이야기의 여성 주인공들은 대체로 우울한 정서에 젖어 있다. 그들은 약간의 패배감에 시달리며 세상에서 한발작 물러선 태도를 취한다. 종종 도피하기도 한다. 작가는 그녀들의 도피를 냉소하지 않는다. 잠시 삶의 변두리로 물러 선 그녀들은 그곳에서 낯선 이들과 예상치 못한 연대를 이루고 위안을 얻는다.


유독 외국인과의 만남이 자주 주제가 된다. <쇼코의 미소>의 쇼코, <씬짜오 씬짜오>의 응웬 아줌마와 투이, <한지와 영주>의 한지, <먼 곳에서 온 노래>의 율랴가 모두 외국인이다. 이들과의 소통은 더듬더듬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이루어진다. 영어로, 독일어로, 러시아어로. 아마 그들의 대화는 조금씩 부족하고 조금씩 왜곡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화가 통한다 느낀다. <씬짜오 씬짜오>에서 엄마는 "너희 아빠와는 말이 통하지 않아"라 말했지만 베트남에서 온 응웬 아줌마와는 살갑게 이야기를 나눈다. 심지어 응웬 아줌마의 가족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아빠와도 간간히 웃음을 주고 받는 대화가 이어진다.


<쇼코의 미소>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소통이 나온다. 주인공 소유는 고등학교 시절 일본에서 교류 학생으로 그녀의 학교에 방문한 쇼코를 만나게 된다. 쇼코는 어설프나마 영어로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소유네 집에 머물며 소유의 할아버지와 인연을 맺는다. 일본으로 돌아간 쇼코와 소유네 가족은 꾸준히 편지를 주고 받는다. 쇼코는 항상 두 통의 편지를 함께 보낸다. 한 통은 소유에게 영어로 적은 편지다.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내용들이 담겨있다. 다른 한 통은 소유의 할아버지에게 일본어로 쓴 편지다. 이 편지 속의 쇼코는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 소녀다. 너무나 다른 이 두 대화는 사실 모두 왜곡되어 있다. 그럼에도 소유와 할아버지, 그리고 쇼코는 서로 주고받는 편지를 통해 서로에게 이야기한다. 진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불완전한 소통 속에 이들은 완전한 타자라 생각했던 이들과 연대를 형성한다.(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외국인들은 극단적으로 나와 다른 '타자'를 상정한 것이라 생각한다)


소설 속 낯선 이와의 소통이 언제나 성공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 떠남으로써 단절되기도, 이유를 알 수 없이 중단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와 완전히 다른 누군가와 사실은 우리 모두 많이 닮아 있다는 걸 발견한다면 이 이야기들은 마냥 슬프고 울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는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다.


"우린 이제 혼자네"

: <쇼코의 미소>의 마지막장에 이르면 쇼코가 소유에게 "우린 이제 혼자네."라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이후 둘은 함께 영화를 보고 편지를 읽고 할아버지의 납골당을 찾는다. 쇼코와 소유는 결국 혼자가 되었지만 혼자인 채로 연대를 이룬다.




팟캐스트에서 낭독해주었던 소설은 <먼 곳에서 온 노래>였다. 그 중 나를 사로잡았던 구절을 기어코 찾아냈다. 선배의 떨리는 목소리가 마치 자신의 작품을 낭독하던 작가의 목소리 같았고 내 목소리 같아서, 그 낯선 이들이 모두 가깝게 느껴졌다.


"5월의 광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지 대학에 와서야 토론할 수 있게 된 스물, 스물하나의 아이들이 그게 너무 아프고 괴로워 노래를 불렀어. 어떤 선배들은 노래가 교육의 도구이자 의식화의 수단이라고 했지만, 나는 우리 노래가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다고 생각해. 나만은 어둠을 따라 살지 말자는 다짐. 함께 노래 부를 수 있는 행복. 그것만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해. 나는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조회시간에 태극기 앞에서 부르는 애국가 같은 게 아니길 바랐어."

선배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진심을 말할 때, 선배의 목소리는 언제나 조금씩 떨렸다. 선배는 말할 때 감정이 배어나오는 나약한 습관을 고치고 싶다고 말했었다. 마음이 약해질 때 목소리가 떨리는 버릇,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성격, 느리게 걷고 느리게 먹고 느리게 읽는 기질, 둔한 운동신경,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백 가지 의미를 찾아내 되새김질하는 예민함 같은 것들을 선배는 부끄러워했다. 그런 약점들을 이겨내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선배가 생각했던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선배가 스스로 약점이라 여겼던 것들을 사랑했고, 무엇보다도 그것들 덕분에 자주 웃었다.

-먼 곳에서 온 노래, 최은영 < 쇼코의 미소> 중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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