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t Theatre

빌리 엘리어트 합격, 나 불합격

영화와 만나는 워스트 타이밍

by 프롬

자존감이 지하를 뚫고 들어가던 취준생 시절, 그날은 최종면접 결과 발표날이었다. 아침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번엔 정말 될 것 같았다. 합격 통보 문자부터 시작해 첫 출근날까지, 이미 내 마음속에선 신입사원 입사로 시작되는 오피스 드라마가 그려지고 있었다. 이러면 안 돼, 이렇게 설레발치다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하려고-라며 억지로 진정하려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자꾸 마음이 붕붕 떴다. 도저히 진정이 안됐다.


그러나 나는 또, 떨어졌다.


불합격, 다음 기회... 아무리 베이고 또 베여도 이 단어들의 날카로움은 무뎌지질 않았다. 외려 단어들도 갈고 닦여지는 건지 더 날이 시퍼렇게 잘 벼려진 것 같았다. 온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머릿속을 온통 점령한 자괴감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기운 빠지도록 한참을 운 상태였다. 이제 이 생각을 그만둬야만 했다.




영화를 보기로 했다. 제발 이 괴로움의 반복 재생 속에서 헤어나게 해 주길.


선택한 영화는 <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였다. 사실 선택이라기보단 얻어걸린 영화였다. 그냥 아무거나 재생시켰으니까. 고민할 정신이 없었다.


당연히 집중이 안됐다. 여전히 훌쩍거리는 코와 너무 울어 시큰시큰 아파오는 두 눈으로 쪼그려 앉아 멍하니 화면을 쳐다보던 내 모습이 방 안 거울로 비춰 보였고, 그 모습이 또 한심해서 좌절했다. 으이구, 너 왜 이 꼴이냐.


다행히 빌리 엘리어트는 훌륭한 영화였고 덕분에 나는 중반을 넘어서며 점차 안정적으로 영화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날의 내가 볼 영화로는 적절하지 않단 것도 모른 체.


movie_image.jpg?type=m886_590_2 출처 : 네이버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0) : 대처 정권 하 영국 가난한 도시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빌리가 천부적인 재능과 열정으로 불우한 환경과 사회적 편견을 뛰어넘어 발레리노로 나아가는 이야기.


영화 후반부, 빌리가 발레학교 오디션 결과를 기다리는 장면이 있다. 드디어 결과를 담은 우편이 도착하고 가족들은 궁금해 미칠 것 같지만 빌리를 기다리며 편지 봉투를 앞에 두고 안절부절못하기만 한다. 드디어 빌리가 집에 도착해 봉투를 전해 받고 조용히 혼자 방으로 들어간다. 부욱 찢어 낸 봉투 속 통지서를 꺼내어 본 빌리의 표정. 빌리 특유의 불퉁한 표정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지만, 알 수 있다. 합격이다.


그래, 하필이면 이 좋은 영화가 그런 장면을 담고 있었다.


그날 그 장면을 보던 심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빌리가 정말 잘됐으면 좋겠지만,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지만, 나는 막 불합격 통지를 받은 상태였다. 괴로웠다. 질투할 사람이 없어 영화 속 저 어린 소년을 질투하나.


이 영화가 얼마나 좋은 영화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빌리를 응원하게 했다는 거다. 대단하지 않은가.

그래, 너라도 합격해라.


나는 그날 빌리 엘리어트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어이가 없지만 결국엔 너라도 합격했으니 됐다 싶더라.





나는 지금 작은 기업에서 인사 담당 일을 하고 있다. 덕분에 채용시기 지원자들을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면접자들은 마치 전쟁이라도 나가는 양 까만 정장으로 단단한 갑옷을 갖춰 입고 온다. 정장과 구두, 그 무게와 갑갑함을 나는 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 면접엔 몇 분 정도가 들어오실 거예요, 들어가시면 어디에 앉으시면 되고 어떻게 하시면 돼요, 저희 면접위원분들이 가장 중요시하시는 건 이런 부분이니까 말씀하시면서 그런 쪽으로 어필하시면 좋을 거예요 등등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줄줄이 읊어주곤 한다. 다들 눈을 반짝이며 듣는다.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를 낯선 공간에 와 있는 그들에게 내가 하는 말들은 그나마의 단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별 것 아닌 말들에도 고마워하는 얼굴들을 보고 있자면 외려 내가 더 고마운 마음이 든다. 티 낼 순 없지만 마음으로 열심히 응원하기도 한다. 다들 잘되었으면.


지난 1월 빌리 엘리어트가 재개봉을 했다. 가까운 영화관에서 상영을 하지 않아 새벽같이 조금 먼 길을 나섰다. 조조영화 상영관에 들어가니 관객은 나까지 네 명이었다. 이번엔 맘 편히 엉엉 울면서 봤다. 그날보다 더 많이 울면서 본 것 같다. 팅팅 부은 두 눈으로 상영관을 나서는데 행복했다.


빌리가 백조가 되어 날아올랐다.


https://www.youtube.com/watch?v=CH8HV5gXQB4

기어코 아버지를 설득해 낸, 빌리 엘리어트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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