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t Theatr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롬 Mar 19. 2018

배역과 배우가 공명할 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2017)

제 아무리 대단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라도 모든 역할을 다 소화할 수는 없다. 배역은 필연적으로 배우의 내외적 특성에 의존한다. 배우의 나이와 외모와 목소리는, 그래서 중요하다.


한 배우가 '소년성' 혹은 '소녀성'을 표현할 수 있는 시기는 무척이나 한정적이다. 단정한 교복 차림에 책가방을 멘 모습이 어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길어야 몇 년밖에 이어지지 못할 찰나의 축복과 같다. 물론 기적적인 동안의 예외 사례도 있긴 하지만(장나라라던가, 임수정이라던가) 일단 배우의 나이를 인지하는 순간 '어떻게 저렇게 어려보이지'라는 놀라움 섞인 감탄이 ‘소녀성’이 가진 풋풋한 신선함을 깎아내릴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10대 후반에서 20대 전반으로 이어지는 몇 년간의 짧은 시기에 자신의 소년성 혹은 소녀성을 최대한 발현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난다는 건 배우 입장에서 대단한 행운인 셈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에서의 티모시 샬라메가 잡은 것이 바로 그 행운이다.



<아이 엠 러브>,<비거 스플래쉬>를 만든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신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작년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이어진 각종 시상식 시즌에 가장 주목받은 작품 중 하나다. 특히 티모시 샬라메는 80년만에 최연소 오스카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션되면서 무명 배우에서 단숨에 가장 핫한 젊은 스타로 떠올랐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1980년대 이탈리아 북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17살 소년 엘리오와 24살 연구 학생 올리버의 사랑 이야기로, 안드레 애치먼이 쓴 동명의 소설에 기반하고 있다. 루카 감독 특유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연출과 아름다운 이탈리아 풍광이 어우러진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 마음으로 거대한 사랑의 도래를 겪어내는 소년의 마음을 오롯히 담아내는데 집중한다.


제목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즉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것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온전히 ‘그 사람’이 되는 체험이다. 나의 모든 것이 ‘그’를 통해 존재하는 것, 무엇을 보아도 그를 통해 보고, 무엇을 들어도 그를 통해 듣는 것, 모든 사고와 감각이 ‘그’로 연결되고 치환되는 것, 그것이 열 일곱 소년이 마주한 강렬한 첫사랑의 정의이다.


티모시 샬라메는 바로 그 소년, 엘리오 역을 맡았다. <인터스텔라>를 비롯해 몇몇 작품을 거치긴 했지만 이름을 각인시킬 만한 배역을 맡지는 못했던 이 배우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통해 드디어 스스로의 재능을 제대로 선보일 기회를 얻었다. 소심한듯 대담하고 어린듯 성숙하며 위험하도록 사랑스러운 십대 소년 엘리오의 변덕스러운 심리 드라마 속에서 티모시 샬라메는 다채로운 감정을 섬세하면서도 비전형적인 방식으로 표현해낸다.


영화 스스로 직접적으로 비유하듯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미소년을 떠올리게 하는 티모시 샬라메의 얼굴과 굵지 않지만 울림이 좋은 목소리, 단단하게 성장한 뼈대와 달리 여전히 앳되게 마른 몸, 그 모든 배우의 특성이 엘리오라는 캐릭터와 완벽하게 공명한다. 피어나는 배우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목도하는 것은 관객의 입장에서도 설레는 일이다. 아마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통해 ‘티모시 샬라메’라는 배우를 알게 되었음에 행복해 할 것이다.



상처로 남았을지언정 유적지가 되어 광장에 자리잡은 1차 세계대전의 흔적처럼 뜨겁게 겪어낸 사랑의 상처 역시 사라지지 않고 엘리오의 안에 자리잡을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처럼 모든 것은 흐르고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지만, 그럼에도 강물이 강물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흘러간다고 어찌 사랑이 사랑이 아니게 되겠는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소년의 사랑을 어린 시기의 치기로 가벼이 치부하지 않는 미덕을 지닌 영화다. 외려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가장 진심어린 찬사와 함께 긍정한다. 그렇기에 엘리오가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그 마지막 순간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은 것이다. 사랑이 소년에게 남긴 것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프레스 투어를 하며 가볍게 시퀄에 대해 농담을 하는 거라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시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시리즈가 만들어지기 어려운 멜로 장르에, 심지어 퀴어, 심지어 시대극인 걸 감안하면 정말로 흔치 않은 기획이다. 비포 시리즈처럼 자연스럽게 나이 먹어 가는 배우들과 함께 하는 감동을, 엘리오에게서 기대해봐도 되는 것일까. 시퀄 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이야기까지 기대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저 사랑이어서 아름다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