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지사진관 Jan 26. 2018

세 번째 주제.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세 번째 주제.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한 때 좋아했던 영화가 있다. 행복을 찾아서 라는 영화인데. 수능에 실패하고 재수를 해야 했을 때 보고 펑펑 울었다. 


"네가 하지 못할 거란 말 따위 신경 쓰지 마. 꿈이 있다면, 그걸 지켜야 해.

원하는 게 있다면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돼"


영화에 나오는 대사인데 항상 '노력'하면 잘 될 거라 생각했다. 세상은 노력만으로 되지 않다는 슬픈 사실을 몰랐다. 그때가 어렴풋이 기억 은나지 않지만 하나 확실했던 것은 '행복=공부'라는 프레임에 갇혀있었던 것 같다. 긴 터널을 빠져나와 20대 그리고 30대가 되니 요즘은 스마트폰만 열면 뉴스나 트렌드에 영향을 받는 나이가 되었다. 취업, 회사생활, 육아 등등 하루에도 쏟아지는 뉴스 뒤편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행복이라는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20대는 세계일주를 떠나는 친구, 집이 여유 있는 친구, 어떤 분야에 특출 나서 무엇하나 잘 하는 친구가 행복할 거라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난 항상 누구와 비교를 하는 열등감이 많아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늘 나와 다른 것을 하는 친구들은 행복해 보이고, 나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라며 주변 상황을 탓하기 바빴다. 직장 생활하면서도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은 그저 불행할 거라 생각했다. 다들 꿈이 없나? 아침 지하철에서 만나는 표정은 왜 이리 어둡지? 


착각이었다.

자신들만의 행복을 지켜나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여행을 가면 꼭 수영을 해야 행복하고, 즐거운 친구가 있다. 나는 수영을 하지 못하기에 그 행복의 결을 모른다. 내겐 출근길에 5615번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았을 때, 여행 중 아침에 맛있는 커피를 한 잔 했을 때가 더 행복하니까 말이다. 일요일 아침에는 꼭 카페를 간다. 편안하고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 너무 좋다.  


'행복'이라는 것이 엄청 거창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 같다. 요즘 트렌드인 소확행이라는 단어도 그래서 생긴 것 이 아닐까 싶다. 지금이야 일요일 아침에 카페를 가는 것이 행복이지만 나중에는 아닐 수가 있다. 어찌보면 삶에서 행복하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내게 행복을 주는 결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오는게 아닐까 싶다. 365일 중에 360일이 다 행복하지는 않지만 즐겁게 살고 싶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멀리가 아닌

바로 

여기

지금 부터이기에,


오랜만에 긴 글을 썼다. 결론. 행복하게 삽니다. 


글. 엄지사진관


지난주 목요일과 금요일, 의도치 않게, 계획에 없이 이틀을 쉬었다. 아프다기보다는 참 고단했다. 마치 지난 십 년간의 감기를 이번 한 계절에 다 겪는 듯했다. 


당일 아침에 팀장님께 양해를 구하며 휴가를 보고하는 전화를 드렸다. 각시와 장모님의 배려로 아이들을 피해서 이틀을 쉬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과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2권을 가지고침대에 누워선 자다 읽다 자다 읽다 했다. 

에세이를 잘 읽지 않는다. 아니 찾아서 읽어 본 적이 별로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소확생(小確幸)’이 트렌드라고 하니.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하루키가 미국 보스턴 근교의 케임브리지에서 보낸 2년의 일상과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침대에 누워서 읽고 있자니, 내가 하루키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찰스강을 조깅하고 옆집 고양이를 걱정하면서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인 듯. 에세이의 재미가 이런 거구나!


나의 소확행을 돌이켜봤다. 

토요일 아침 7시 50분에잠을 깬다. 눈을 뜨면 누워서 나를 쳐다보는 아들과 눈이 마주친다. 녀석은 보통 아빠나 엄마가 깰 때까지 조용히 누워있는다. 아니 뒹굴뒹굴한다.각시와 둘째가 깨지 않게 나지막하게 “나갈까?” 이야기하면 첫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몸을 일으킨다.


부자는 조용히 침실을 빠져 나와 거실로 나선다. 아들은 장난감 바구니를 뒤지고 아빠는 거실 동쪽과 북쪽 창의 커튼을 걷는다. 창 너머 산등성을 따라 어스름하게 해가 올라오는 시각이다. 


주방에 가서 라디오를 켠다. 커피콩 2스푼을 그라인더에 넣고 간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드리퍼와 거름종이를 꺼내서 서버에 올린다. 갈려진 콩을 거름종이에 붓고 끓었던 물을 살살 부어 커피를 내린다. 아내를 위한 디카페인 커피를 만들기 위해 같은 동작을 한번 더 반복한다. 


800ml의 커피가 다 내려질 때면 각시가 거실로 나온다. 햇살은 산을 넘어 거실로 들이친다. 

식빵을 가져와서 토스터기에 넣는다. 3분 타이머를 맞춘다. 잽싸게 접시를 식탁에 올리고, 냉장고에서 딸기잼과 버터를 꺼낸다. 이렇게 아침이 준비되면 “엥~”하고 침실에서 둘째가 울어댄다. 각시가 둘째를 안고 나와서 식탁에 앉는다. 첫째를 의자에 앉히고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서 잔에 따라 첫째에게 건넨다. 

그렇게 모여 앉아서 떠들어댄다. 나와 아들이 동시에 말하니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지난 일주일 동안의 일과 앞으로 일주일 동안의 일들을 다 쏟아낸다. 매일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이야기하는데도 토요일 아침 밥상의 수다는 마르지를 않는다. 커피 한모금을 입에 대며 “아~ 좋다”는 탄성으로 여유로움을 표현한다. 토요일 오전, 이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약속도 외출도 잘 안 잡게 된다. 


그 이후의 주말 시간은 교대도, 타임아웃도 없는 육아에 골몰하게 된다. 내가 첫째와 놀 때면 각시는 둘째를 먹이거나 재우고 있고, 내가 식사를 준비할 때면 각시는 첫째와 놀고 있다. 저녁 10시가 다되어서 아이 둘을 재우고 나면 그나마 자유 시간인데, 그 시간이면 나와 각시 둘 중 하나도 자고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토요일과 일요일을 보내고 난 지난주 월요일 출근길. 버스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참으로 곤히 주무신다. 왼쪽 손등을 보니 곰돌이 모양의 스티커 자국이 있다. 주말내 자녀와 열심히 노셨나 보다. 괜히 어깨를 툭 치며 “수고하셨어요!”해주고 싶다. 


아이와 논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아이에겐 놀이지만 부모에겐 놀이가 아니니까. 아파서 누워있던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 아이들을 피해서 휴식하던 그 이틀 동안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다. 그런데 그 여운이 주말까지 미쳤다. 아들과 시간에 소홀하게 됐다. 티가 팍팍 났나 보다. 아니 티를 팍팍 냈다.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는데 각시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자기야. 주말에 좀더 최선을 다해서 첫째랑 놀자. 첫째가 길어야 5년 아기 모습일텐데. 우리 체력은 오늘이 내일보다 젊을 때야. 체력이 오늘보다 내일 좋아지진 않는다고. 유일한 자유 시간 찾는다고 밤에 늦게 자게 되면 다음날 피곤한 건 당연하고. 그렇게 주말 내내 피곤하다고 아이와 노는 게 소홀하다 보면 금방 크겠지. 내 시간은 조금 나중에 즐기고 아기들과 많이 즐거운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 월요일 아침부터 미안.”


그렇다. 시간은 복리로 내 젊음을 꼬박꼬박 챙겨간다. 내 아들과 딸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아들이 너무 빨리 크는 것을 탄식하면서도 나는 시간의 몫을 2배로 챙겨주고 있었다. 내 시간, 아들의 시간, 이렇게 각자의 시간으로. ‘우리 함께’의 시간을 보내면 되는데 말이다. 


“야 이놈의 시간아, 됐다마~ 내 젊음만 가져가라!”


글.엘리엇

작가의 이전글 두 번째 주제. 프로페셔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