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지사진관 Aug 17. 2019

첫째라는 무게감

누가 보면 꼴 깞떠네?


퇴사를 하고 무얼 할지에 대해 고민이 많을 때, 나조차도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결정을 못 할 때 가장 결정적으로 응원이 되었던 것은 7월 마지막 날 아버지가 내게 보낸 장문의 문자였다. 문자를 받았을 당시 아주 큰 세미나 자리에 있었고, 나중에 읽어야지 했던 문자를 읽고 세미나 맨 뒷자리에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마도 앞에 있던 강연자는 강연 스토리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훔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세미나가 생각보다 늦게 끝나 밤 10시가 넘었지만 집에 갈 수 없다며 우리가 좋아하는 종로에서 오빠와 나는 소주를 마셨다. 밖은 엄청난 비가 내렸지만, 가게 안은 따뜻했다. 


"축하해 용기 있는 결정이다"

 대체 용기란 무엇이란 말이가. 

"용기라는 단어 쓰지 마.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럼 용기 없는 사람들이야?"

"그것보다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하는 용기 말이야. 멍청이야" 


11시면 문을 닫는다는 가게는 사연이 많은 우리 둘을 보며 술 좀 더 많이 마시고 가라며

사실... 간단히 먹는다고 했는데 둘이서 고기 5인분 먹었으니.. 좀 양해를 구해도 되지요? 밖에 비도 많이 오는데.  집안에서 첫째였던 나는 늘 뭐든 일등으로 잘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달리기도 잘해야 하고, 공부도 잘해야 하고, 양보도 잘해야 하고, 동생들에게 모범도 보여야 하고... 아니 왜 첫째는 다 양보를 해야 하는가!  다행히  조부모님, 부모님은 아들딸. 성별에 대한 차별 없이 자식들을 키웠다. 아직도 선명한 것 중에 하나가 유치원에서 하는 역할놀이 사건이다.


"아빠 유치원에서 병원 놀이하는데 여자라서 간호사를 했어요"라고 말을 하니

"왜 여자가 간호사를 해야 하지?"라고 말을 하셨다. 

(요즘 말하는 페미닌 즘 뭐 그런 거 아니다 절대)


조카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서  자식 교육에 대한 많은 생각들이 드는데.  부모님은 참 깨어있었던 분이었다. 내가 성장하던 90년대는 학교가 끝나면 피아노 학원.  태권도. 미술 학원을 갔다.   생각해보면 피아노 학원에 가는 남자아이가 낯설고. 태권도에 거 검은띠를 딴 언니가 신기했다. 사실 그러면 안 되는데. 아버지가 한 번은 검도를 배워 보라고 했는데. 내가 너무 작아 큰 키를 가진 오빠들 앞에서 적지 않게 당황한 적도 있었다. 


"아빠 검도는 남자들이 하는 것 같아요" 

"아니.  운동에 남자 여자 이런 게 나눠져 있는 게 아니야" 

나보다 더 깨어 있는 부모님 밑에서 수십 년을 자라왔다. 

그런데 나는 왜 젊은 꼰대인지는 모르겠지만...ㅎㅎ 


아버지는 항상 인사성 바르고, 친구들 사이 교우관계도 좋으며 공부도 잘하기를 바랐다. 국민학교  성적표에 한편에 통신란에 적힌 교우 관계가 원만하고, 활동적입니다. 매사에 적극적입니다 등등의 말은 사실 나와 거리가 먼 단어들이다. 뭐 10대와 30대 성격이 다를 수 있겠지만. 그때 교우 관계가 원만했으면 지금 초중고 친구 한 명 없겠나 싶다. 왜 그렇게 보이는 성격을 강요했는지 모르겠다. 


첫째라서 느꼈던 책임감 중에 하나는 공부를 잘해야 하는 것이었다. 진짜 진짜 이건 돌이켜 생각해보면 주변에 공부 잘하는 친구들을 보면 공부 또한 타고난 것인 것 같다.  노력해서 안 되는 것 중에 사람에 마음을 얻는 사랑도 있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공부를 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_-.... 노력하면 된다고 하면서 공부하는 시간을 길게 가죠 봤지만.. 역시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대학교를 입학한 순간부터 좋아하는 것 이외에 공부를 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특히 언어영역은 젬병이었다. 언어영역은 2개 이상 틀리는 게 신기한 과목이라고 하는데 난 도대체 왜 그게 답인지 몰랐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생각이 많았나 보다. 첫째라서 공부를 잘해서 대학을 잘 가야 한다는 프레임은 남들의 시선을 늘 의식하게 만들었고, 허세와 입방정 그리고 없지 않아 거짓말을 잘했던 것 같다. 그렇게 쌓여온 성격이나 가치관은 어떤 충격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30대가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래서 사람 고쳐 쓰면 안 되나 보다. 알게 모르게 내게 있던 첫째라서. 첫째니까의 오는 책임감은 그래서 늘 내 위에 오빠나 언니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아니 내가 첫째로 태어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잖아. 

로마 가족여행을 갔을 때

"그래도 첫째 치고 너 하고 싶은 데로 다 하고 살잖아"

"제가 얼마나 많은 것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잖아요"

자식이 부모 나이만큼 컸다고 해서 또박또박 대들거나, 위로 올라서려고 하면 절대 안 된다.

다만 커가면서 어떤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성장하는지는 많은 대화를 통해 

이해하고, 간격을 좁혀가야 하는 것 같다. 나 또한 부모님이 되면(?) 이런 부모님이 돼야겠지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 고민과 이야기들은 친구들과 소주 한 잔 나누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번 결정 앞에서도 나 스스로와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는 했지만,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프레임에 갇혀, 앞으로 방향에 대해 잘 전달하지 못한 것 같은데, 결정적으로 멀리 있던 부모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 문자에 용기가 났는지 모른다. 


자식 교육이 쉽지 않을 건 안다

특히

나 같은 고집 대마왕을 키우신 부모님께 감사를

나조차도 적응을 못해 방황했는데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하며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이 글은 샤워를 하다가 머릿속에 지나가던 스토리인데 

샤워를 하고, 글로 적다 보니 글이 산으로 갔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