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던 순간을 잊지 말자
대인기피증으로 대학생활을 힘겹게 버티던 시절, 동생의 전화를 받고 그제야 엉망이 되어있던 자신의 생활을 바꿔보고자 사진을 시작했다는 그녀, 좋아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 수없이 사진을 찍으러 다녔고, 현재는 홍보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한때는 학벌에 대한 열등감으로 여러 차례 좌절을 겪었으나, 사진을 통해 삶의 여러 면모를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는 그녀는 청춘들에게 성급히 포기하기 이전에 무엇이든 직접 겪어보라고 말한다. 무작정 뛰어들어 경험해 봐야만 알 수 있는 일들이 정말 많다는 이유에서다.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을 하며 공부의 '공'자도 관심이 없던 나였다. 그런데 재수, 삼수를 하면서 대학교 학벌에 대한 열등감이 엄청나게 커지기 시작했다. 나고 자란 곳(경상남도 진해)이 그리 산골짜기도 아니건만 '인 서울'이 곧 인생의 성공이라 생각하게 됐다.
나의 고집으로 사수까지 했다. 물론 성적이 점점 좋아져서가 아니라 그저 열등감 때문이었다. 그 시절 그 눈높이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그때의 눈높이가 거기까지였다는 것을 느낀다.
한때 인생의 전부처럼 커 보였던 것도 돌아보면 문득 작아져 있었다. 보통 여대생이 23살이면 4학년 취업에 뛰어들 시기이다. 그러나 23살 나는 이제 겨우 1학년. 남들보다 한참 뒤처져 있었다. 늦었다는 조바심 탓에 매일 4시간씩 잤다. 무엇이든 잠을 줄여서라도 적극적으로 해보려고 했다. 좀 잘 살아보려고 그랬다.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던 대학생활의 환상은 두 달도 채 가지 않았다. 당시 좋아했던 사람과 헤어졌기 때문이다. 어디 하나 붙잡을 것 없이 벼랑에서 떨어진 기분이었다. 대인기피증 증세가 나타났고 정을 붙일락 말락 했던 학교는 나가지도 않게 되었다. 서울 생활은 허황된 꿈같았다. 이렇게 살 바엔 죽는 게 낫겠지 싶던 어느 날, 며칠 내 낸 울리지 않던 핸드폰이 울렸다.
"언니 잘 지내나! 난 언니가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로 대학 간 게 역시 자랑스럽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한마디.
벼랑 끝에서도 내 편인 가족이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엉망이 된 생활을 바꾸고 싶었다.
대인기피증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바로 '사진'이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서는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게 되었고,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상황을 일부러 만들었다.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되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찍고 기록했다.
그렇게 사진에 대한 애정이 커지다 보니 정말 잘하고 싶어 졌다. 어떤 사진을 찍으러 가게 되면 인터넷에 있는 좋은 작품을 수없이 찾아 노트에 그려갔다. 그려 간 사진과 똑같이 찍을 수는 없었지만 타인의 사진을 통해 많이 배웠다. 사람 사진을 찍다 보니 저널리즘에도 관심이 생겼고, 사진기자들이 찍는 사진도 자주 보게 되었다. 너무 궁금한 사진은 사진기자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 물어보곤 했다.
"왜 이렇게 찍으셨어요?" "어떻게 찍으셨어요"
물론 돌아오는 회신은 없었지만 나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운 좋게 사진동아리를 통해 신문사 사진부 인턴기자를 했고 그 뒤 모 신문사에서 인턴제의를 받았다. 나는 내 인생이 바뀔 두 번째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니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내가 찍고 싶은 사진이 아니라 회사에서 시키는 사진이 우선이었고, 연예인 사진을 찍는 날에는 도망을 치고 싶었다. 주위 사람들은 '사진을 좋아해서 사진기자 되었다더라' '연예인 사진 찍는다더라'하며 부러워했지만
타인에게 비치는 나의 이미지와 실제 생활은 너무 달랐다. 결국 졸업 논문과 시험까지 겹쳐
다음 학기에 졸업을 미루면 안 되는 상황. 사직서를 냈다.
인턴을 그만두고 먼저 한 일은 제주도 여행이었다. 몇 푼 모우 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번 돈을 탈탈 털어 도착한 제주도에서 우연히 해녀학교 졸업식을 마주하게 됐다. 그곳에서 할머니 졸업사진을 찍어드리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이거다!' 그리고는 사진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진을 찍어 돈을 버 게 아니라 우리만의 사진으로 재미있는 일들을 벌어보자고 생각했다.
그리렇게 '사진 재능기부 동아리'활동이 시작되었다. 농어촌 지역 초등학교 사진 수업, 독거노인 가족 촬영, 어르신 장수사진 촬영, 사진여행 등 사진이라는 소재로 많은 사람들과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특히, 제주도 귀덕초등학교 재능기부 사진 수업을 할 때는
아이들의 눈 높이에서 볼 수 있는 창의 적인 시선에 놀랐고,
영정사진을 찍을 때는 어르신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진이라는 소재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혼자 하기에는 힘들었지만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해서 즐거웠다.
자기소개서 120개. 왜 나는 취업이 안 될까?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제법 잘 나가는 것 같던 친구들이
갑자기 연락이 뚝 끊길 때가 있다. 바로 취업을 준비할 때.
내가 그랬다. 자기소개서를 120개 넘게 쓰면서
'대학교 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잘 해왔는데 취업은 왜 안되지?'라는 자괴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타인이 좋게 평가해주는 나의 모습에 취해 있을게 아니라 스스로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점검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모르고 있었다.
'학점 2.0 토익 점수 없음'
세상에, 부끄럽지만 이게 내 현실이었다. 열정적으로 대학생활을 보냈으니 당연히 어디서는 나를 원할 거라는 기대는 크나 큰 착각이었다. 나의 대행상활의 8할은 사진인데 취업에 있었어서는 산업경영이라는 전공을 살리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도둑놈 심보였다는 사실을 너무도 늦게 알았다.
스펙보다 스토리를 내세운다면? 업무에 필요한 기본적인
스펙도 갖추지 않고 스토리를 말한다는 것도 웃겼다. 어릴 때 운동선수였던 것은 업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 나는 열심히 그 회사와 동떨어진 스토리만 읊어대고 있었다.
120번째 자기소개서가 탈락되던 날, 방에 틀어박혀 입학한 날부터 졸업할 때까지 대학생활을 전지 여섯 장이 차도록 일일이 적어보았다. 그 과정에서 내게 즐겁고 재미있는 것은 '다양한 것을 기획하면서 아이디어를 내는 순간'과 '사진을 찍는 순간'이며 그 두 가지의 교차점이 PR회사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때부터 부랴부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국내 PR회사 50여 곳을 돌아다니면서 포트폴리오를 직접 제출해서 몇 번의 면접 기회도 얻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중 한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불안감 속에 나와 내 친구들은 마치 게임에 빠진 것 같다. 영어, 대외활동 학점 등을 아이템 삼아'취뽀'를 클리어 하면 또 다른 세계로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사회생활이라는 게임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지금 불안하게 하는 모든 것은 겪지 않았기에 가지는 환상에서 비롯된다. 수능을 못 치면 인생이 망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좋은 대학을 가야 해외여행도 가고 유학을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단지 개인의 역량에 달린 것이었다. 대기업을 가면 다 행복한 줄 알았다. 돈은 많이 벌겠지만 일만 하는 기계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러니 일단은 뭐가 됐는 부딪혀봐야 한다. 무슨 일이든 우리는 극복해내며 성장한다. 모험 앞에서 수동적으로 변하는 20대 친구들을 보며 '겪어보기 전엔 모르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라며 안타까워한 적도 있었다.
늘 질문하자.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왜 사는 걸까'
그리고
'나는 지금 행복한가?'를
머뭇거리는 순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름다운 것들을 놓치게 된다. 돈 없고 백 없어도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돌아보니 가진 게 없어서 잃을 게 없는데 그 하나의 용기를 가지는 게 참 어려웠다.
누구나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