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집

되는대로 일기

by 산책

단골집들이 생각나는 밤이다.

날이 스산해지니 평양냉면 생각이 절실하다. 밋밋한 그 맛은 겨울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함경도 출신인 아버지와 외출할 때면 함흥냉면이 주 외식 메뉴였지만, 내가 스스로 돈을 주고 음식을 사 먹을 수 있게 될 무렵부터 나는 아버지를 배신했다. 함흥냉면보다는 평양냉면이지, 차가운 육수 속에 푹 떨어진 메밀 맛 냉면의 고소함과 맹함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평양냉면은 물냉면이 진리이고, 거기다 접시 만두를 반 곁들여서 속이 숙주와 두부로 꽉 찬 손만두 반을 입에 넣은 상태에서 육수를 한 입. (소주를 부르는 맛) 평양냉면 집을 여러 군데 찾아다녔으나 시간을 내서 꼭 한 군데를 간다면 어린이대공원 옆 '서북 면옥'을 들른다. 오래된 노포만이 갖는 정취가 있다. 화장실마저 예스러워서 옛 가옥 2층 삐걱 거리는 계단을 올라 마주하는 좁은 복도 조차 정겹다. 입식 테이블 서너 개와 좌식 방은 무조건 합석. 그러나 다들 개의치 않고 각자의 평양냉면과 접시 만두를 비운다. (아 배고파)


서울 시립미술관이나 덕수궁 미술관에 가는 날이면 들르는 정동길 '르풀'과 '르풀'의 시그니처 라자냐도 있다. 라자냐는 만들기 까다로운 음식이라고 들었다. 파스타 면을 넓은 사각형 모양으로 자르고 그 위에 라구 소스와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를 얹고 다시 면을 덮고 또 속재료를 얹는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해서 마치 케이크처럼 구워낸다. 포크로 두껍게 잘라한 입 가득 넣으면, 바질과 토마토, 소고기와 치즈를 감싼 면이 한데 엉키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식탁 앞에 앉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빨갛고 노란 라자냐의 모습은 단풍 짙은 가을의 정동길과 가을의 미술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이다. (산책 피셜)


우유를 잘 소화시키지 못하게 된 이후로 잊고 살고 있지만,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에 빼놓을 수 없는 음료는 뭐니 뭐니 해도 우유를 곁들인 커피류, 카푸치노와 라떼가 아닐까. 우유 거품이 눈 쌓인 풍경이어서 더 그런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어릴 적 읽었던 책 속 우유 듬뿍 핫초코에 대한 추억을 어른이 되어 이렇게 둔갑시켰다. 커피는 머리 나빠진다고 못 마시게 했던 어른들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었을 때 제일 처음 한 일은 커피 음료를 마신 것이었다. 달달한 캔커피에서 조금 더 어른스러워지려고 선택한 것이 우유가 들어간 라떼류 였는데, 이게 또 내 입에 딱 맞는 커피집을 찾는 재미를 주었다. 촘촘한 우유 거품과 함께 산미가 도는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 바로 어른과 아이가 공존하는 순간이다. 한참 라떼 맛집을 찾을 때 갔던 곳 중 하나는 가로수 길의 커피 키친(현 이코복스 커피). 이 집은 반 지층에 위치해 있는데, 높은 바 테이블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보는 즐거움을 덤으로 줬다.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시는 커피는 세상의 시간을 차단시킨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크로와상! 크로와상 같은 패스츄리를 좋아한다. 하지만 패스츄리 중 하나를 고른다면 담백한 크로와상이다. 인생이 느껴지는 결이 좋다. 겹겹이 쌓인 세월을 보여주는 단면이 좋다. 사이사이 느껴지는 버터의 풍미도, 해서 라떼와 함께 하면 세상의 모든 관계를 다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켜켜이 쌓아 온 시간 속에 기쁨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바삭하게 부서지는 맛도 질기게 끊어지지 않는 무엇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음식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밋밋한 것은 아니라고, 버터만큼의 고소함이 입천장에 남아 있다고 크로와상은 제 한 몸을 바쳐가며 내게 말한다. 자, 그러니까 모든 관계는 나와 같아. 시간이 주는 힘이 있지, 쌓아나가는 시간의 결을 잊지 마. 한때는 크로와상 맛집을 찾아 가로수길, 상수, 합정, 연희동 일대를 헤맨 적도 있다. 오래전 기억으로 하나를 꼽자면 신사동 '르 알래스카'. 어둡고 낮은 조명과 갈색의 가구들 사이에서 갈색의 크로와상을 먹었던 날 역시 공간을 초월 해 파리 어느 빵집에 들른 기분이었다.




단골집이 생각나는 이유는 그립기 때문이다. 평양냉면을 먹고 한강을 건너 지는 노을을 앞에 두고 걸어가던 올림픽 체조 경기장의 저녁과 분가 우울증을 읽어내고 나를 불러 내 정동길에서 라자냐를 사 준 친구들과 보낸 한 낮과 촘촘한 우유 거품의 가푸치노 위에 설탕을 뿌리며 깔깔 웃었던 유쾌한 오후가. 혼자 떠난 파리 여행에서 외로움과 두려움, 설렘과 아쉬움 속에 첫 식사와 마지막 식사를 책임진 따끈한 크로와상을 베어 물었던 밤이. 은행잎이 샛노래질수록 깊어지는 마음이 단골집을 부른다.


지금 생각나는 단골집은... 뭐, 동네 원픽으로 유일무이한 아지트, 각종 주류와 안주와 친구들이 상시 대기하는 곳. 별주막이다. (방금 깃 사장님이 올린 굴과 통오징어 찜을 봤다. 추릅) 송명섭이랑 해창, 요즘은 맑은 내일도 맛있던데. 쩜쩜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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