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일상의 단상 #05

by 레터B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더 소중한 순간들이 있다.


‘어쩌면 해피엔딩’이라는 뮤지컬을 처음 알게 된 건 뉴스였다. 토니상이라는, 뮤지컬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익숙한 이름의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고, 그 작품에 한국 사람이 참여했다는 소식이 관심을 끌었다.


브로드웨이에서 성공을 거두고 한국에서 10주년 기념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티켓팅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뮤지컬보다 먼저 영화로 이 작품을 접하게 됐다. 뮤지컬을 먼저 본 사람들 중에는 영화가 아쉽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나는 그마저도 충분히 좋았다. 그리고 어느 날 출근길에 우연히 취소표를 예매할 수 있었고, 그렇게 뮤지컬을 보게 되면서 영화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훨씬 또렷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인간을 돕는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프로그래밍된 존재들이지만, 서로에게 운명처럼 이끌리고 결국 사랑에 빠진다. 로봇이라는 존재는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간 앞에서는 인간과 다르지 않다. 기술은 발전하고, 그들은 구형 모델이 되며, 결국 자신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둘은 사랑하지만, 끝이 보이는 운명 속에서 이별을 선택한다. 끝이 정해진 사랑이라면 계속 이어가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 때문이다. 이별의 과정에서 로봇들은 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한다. 클레어는 올리버를 만나기 일주일 전으로 기억을 지우고, 모든 것을 없던 일처럼 되돌린다. 하지만 올리버는 끝내 기억을 지우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뒤, 그 둘은 처음 그들이 만났을 때처럼 다시 만나게 되게, 그 장면을 끝으로 뮤지컬은 막을 내린다. 어쩌면 또 한 번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을 남긴 채.


흥미로운 점은 이 이야기가 시작될 때 이 둘이 다시 만날 것이라는 암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초반에 클레어는 올리버에게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 있지 않나요?”라고 묻는다. 이 대사는 단순한 호감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과거에도 둘은 이미 만났고 사랑했으며, 같은 선택을 반복해 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기억을 지우고, 다시 만나고, 또다시 사랑에 빠지는 시간의 반복. 하지만 그 반복은 영원이 아니라 언제나 유한한 시간 위에서 이루어진다.


작품 전반에 등장하는 상징들 역시 이 주제를 조용히 보여준다. 올리버가 소중히 키우는 화분은 자연을 화분 안에 옮겨와 오래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닮아 있다. 자연은 본래 영원하지 않지만, 돌보고 가꾸며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려보려는 시도다. LP는 사라지는 음성을 기록해 붙잡으려는 매체다. 말은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만, 기록을 통해 순간을 보존하려 한다. 클레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반딧불은 짧은 수명을 가졌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강하게 빛난다. 오래 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아름답게 기억되는 존재다.


얼마 전 친한 친구에게 꽃을 선물 받았다. 아끼는 화병에 담아 매일 물을 갈아주며 오래오래 바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꽃은 오래 버티지 못했고, 어느새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이 뮤지컬이 떠올랐다.


꽃은 길어야 일주일에서 열흘이면 시들어버린다. 처음의 생기와 아름다움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떨군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꽃을 산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산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공간을 밝히고, 그 순간을 충분히 아름답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 영원한 것은 없고, 사랑도 예외가 아니라면 끝이 있는 사랑을 계속하는 일은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 언젠가는 변하고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관계를 시작하는 선택은 어리석은 행동은 아닐까라고. 올리버와 클레어가 한창 사랑에 빠져 있던 순간, 클레어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우리 어쩌면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 질문은 바로 앞선 물음과 맞닿아 있다. 끝을 알면서도 사랑을 이어가는 행위 자체가 과연 옳은 선택인지, 이 작품은 그 질문을 클레어의 입을 빌려 관객에게 되묻는다.


그 물음의 답을 나는 시들어가는 꽃에서 찾았다. 언젠가 시들 것을 알면서도 꽃을 사고, 짧을 것을 알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즐기듯 사랑도 마찬가지다. 영원하지 않더라도 그 순간의 행복과 가치는 스스로 의미를 가진다. 시간이 지나 사라진다고 해서, 그때의 감정까지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유한하기 때문에 더 강렬하고 선명해진다.


그래서 이 작품의 결말은 완전한 해피엔딩도, 비극도 아니다. 기억은 지워질 수 있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은 남는다. 끝을 알면서도 사랑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바보 같은 행동일지라도 그 바보 같음 속에 인간다움이 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말한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더 소중한 순간들이 있다고. 그 순간들이 있었던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사랑을 선택할 이유를 갖게 된다고. 어쩌면 그것이 이 작품이 말하는 가장 현실적인 해피엔딩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