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사랑이 뭐길래

by 프롬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사랑의 기술>


‘언젠간 읽어야지.’하고 묵혀놨던 소설 중 하나.

고전을 잘 모르지만, 나름 이 소설도 고전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느꼈다.

근데 웬걸? 연애 소설이다.

읽는 내내 ‘여주’의 입장에 푹 빠져 읽은 소설은 오랜만이다.


키워드는 #사랑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책을 다 읽은 이 시점까지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시몽이 처음으로 폴에게 편지를 쓰고, 데이트 신청을 한 장면. 브람스를 좋아하냐는 물음 하나로 폴은 자신과 주변의 관계, 특히 로제와의 관계 안에서 ‘나’란 있었는가...를 고민하게 된 순간이다. 폴은 이 고민 덕분에(?) ‘이참에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한 번 알아보자!’는 식의 마음으로 시몽의 데이트 신청에 응한다. 참고로, 폴은 로제와 연애 중인 여성이다.


폴의 고민에서 ‘나’라는 존재와 ‘관계’에 대한 고민이 스치는데,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관계에 파묻히고 매몰되기 쉽다. 나의 기호, 취향, 생활 습관, 극단적으로는 가치관까지 상대에게 맞춰버리는 경우. 그럼에도 그런 ‘내맡김’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의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나의 모든 것을 상대에게 맞추는 것, ‘무조건 니가 원하는대로 하자.’식의 관계는 결국 나를 지운다.

‘그저 배려심이 넘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를 지운 관계를 오래 유지한 사람들은 간단해보이는 질문에도 답을 못한다. ‘넌 뭘 좋아하니?’, ‘넌 어떤 사람이니?’ 라는 질문에 당황하고 답을 못하는 경우. 이게 관계에 매몰된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는 모든 것이고 내가 그의 일부가 아닌 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략)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고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그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ㅡ 그러나 그는 독립하지는 못한다. 그는 통합성을 갖지 모한다. 그는 아직도 완전히 탄생하지 못한 자다.
<사랑의 기술>


책을 읽으며 확신했다. 폴은 로제의, 로제를 위한, 로제에 의한 삶을 살고 있구나. 겉으로 보기엔 자기의 일을 척척 해나가는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로제에 파묻힌 삶을 살고 있구나.

폴은 로제와 자신의 관계를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시몽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시간을 보내면서도 어렴풋이, 자신이 로제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라 믿는다. 폴의 이런 생각은 소설 안에서 여러번 언급됐지만, 가장 잘 드러났다고 느낀 부분은 시몽의 말이었다.


“당신은 우리의 사랑을 우연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그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해.”


시몽은 느낀 거다. 폴이 생각하는 true love, 그리고 inevitable love는 바로 로제라고. 로제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음을 느끼고도 ‘돌아간다’는 것, 폴과 로제는 ‘우리’일 수밖에 없다고 느끼는 건 그만큼 폴이 로제와의 관계에 매몰되었다는 의미 아닐까. 더 나아가서 로제에게 일종의 예속된 관계를 이어나가는 모습, 누군가의 지배/통제 하에 머물러 궁극에는 자신을 내맡기는 행위를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한 것 아닐까?


“시몽, 시몽.” 그런 다음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하지만 시몽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마치 기쁨에 뛰노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거기에 몸을 기댔다.

폴의 무력함이 사무치게 느껴졌다.

폴은 39세라는 나이에도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유능한 여성이다. 진취적이고, 독립적이며 자립심이 있는 인간. 하지만 이건 외형적인 모습일 뿐, 사랑에서만큼은 익숙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그어버린 듯한 느낌까지 받을 정도로 미숙한 인간으로 보인다. 진정한 사랑을 찾으려 시도했지만, 익숙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버리는...


폴의 ‘심리적 여정’을 기록한 여행기를 한 편 읽은 듯한 기분이었다.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가? 나는 누굴 사랑해야 하는가?’ 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시몽과 로제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인생의 바이블로 삼고 있는 나로서는 폴의 모습이 관계에 도취된 모습 딱 그 정도로 보였고 안타까웠다. ‘거긴 아니야. 다른 길을 찾아봐.’ 라고 얘기해주고 싶은 느낌.


가볍게 읽으려면 한없이 가볍고,

나처럼 한껏 폼 잡고 무겁게 읽으려면 그 진지함이 지구를 뚫어버릴 수도 있겠다... 싶은 소설. 폴 나이대(39세)에 들어서서 읽으면 느낌이 좀 다르려나?


2020.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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