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란 계절 앞에 선 나

by 정온

나에게도 긴 머리카락을 고집하던 시절이 있었다.

단발로 지내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 긴 머리는 좀 그렇지 않나’ 하는 막연한 생각에

‘50살까지만 길러보자’고 스스로에게 기한을 두었다.

결국 쉰이 넘어서야 미련 없이 머리를 싹둑 자르고 단발 펌을 했다.


그 후로는 길이가 길어졌다 짧아졌다를 반복했을 뿐, 스타일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묶을 수 있는 길이가 되면 아무렇게나 질끈 묶었고

모자를 눌러쓰는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서 내 마음도 몸도

오선지 위의 도와 레 사이, 낮은 어딘가에 오래 머물러 있는 듯했다.

고여 있다기보다 큰 움직임 없이 무심히 흘러 보낸 시간 속의 일상처럼.


하필 늦여름 끝에 교통사고까지 겹치면서

마음은 더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하루하루를 통과해 왔다.

그래서였을까. 올해의 마지막 달력을 바라보는 순간

“이제는 뭔가 조금 새로워지고 싶다”는 강렬한 바람이 내부에서 불어왔다.


머리칼을 자르며 얻은 깨달음

새로운 의지를 담아 오랜만에 미용실을 찾았다.

망설임 없이 단번에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곱슬곱슬한 펌을 넣었다.

예전에는 자연스러운 컬을 좋아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이런 잔잔한 컬이 오히려 관리하기 편하고

미용실을 자주 찾지 않아도 된다는 실용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나이를 먹었다고 티를 내는 것인지 몰라도

쉽고 편함을 찾게 되는 순간이 많아졌다.


펌을 마치고 머리를 감겨주는데,

따뜻한 물줄기 속에서 순간 스쳐간 생각이 나를

가볍게 흔들고 갔다.

마치 갈대밭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처럼.


‘아, 나도 좀 새롭게 살아봐야겠다.’


나를 조금 더 챙기고, 조금 더 다독여야겠다는 마음.

그동안 무심히 나 자신에게 소홀했구나 하는

짧은 깨달음이 물결처럼 번져갔다.


꽁꽁 언 길 위에서 멈추는 법

교통사고 이후의 일상은,

새로운 마음을 품고 문밖을 나서려는 순간 뜻밖의 눈 때문에

발목을 잡히는 것 같았다.

꽁꽁 언 길 위에서는 발을 내딛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며칠 전

첫눈이 오던 날 밤, 집 밖으로 나가

소녀처럼 기뻐했던 나였다.

아직 마음은 그즈음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몸은 더 이상 그 마음을 따라주지 못한다는 현실은

‘그래, 안 되겠어. 괜찮아.’

스스로를 힘없이 내려놓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다짐까지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유리창을 스쳐 지나가듯,

공기는 오히려 시원하게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미용실을 나서며 느꼈던 그 고요한 마음처럼

세상은 각자의 속도로 팽이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마음이 먼저 가는 길

굳이 방향을 정하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닐까.

멈춰 서진 말고, 지금 이 마음 그대로만 가면 돼.

새로운 길은 발끝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가는 법이니까.


그렇게 마음에 쌓여 있던 생각의 먼지를

살짝 털어내 보았다.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니 정리해야 할 건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오늘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일.

조금 모자라도 괜찮고,

잠시 이렇게 머물러 있어도 괜찮다는 마음 하나면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와 외투를 벗고 따뜻한 차 한잔을 마셨다.

몸은 그대로인데 마음만은

방금 단발 펌을 끝낸 것처럼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정리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이렇게 나를 들여다보며

얼어붙은 길 위에서 멈추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 걸음씩만 걸어간다면,

다른 누구의 내가 아니라

나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거창하게 살아갈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각자 주어진 삶으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행복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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