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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간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해 주다

판에 박힌 일상에서 한 걸음 멀어지니 보이는 것들


“정말 여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아!" 


내가 우리 남편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그는 매우 변칙적인 사람이다. 성품을 언급할 때 말하는 변덕스러운 것과는 정말 다르다. 왜냐하면 남편이야말로 진실되고 일관된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굉장히 오선지 같은 사람이다. 그는 늘 평안하고 불안함이 없으며 평정심이 있고 그 가운데 당당하다. 자신이 가진 명확한 가치관과 세계관 안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발전시킨다. 그런 그에게 변칙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에게는 반복적인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루틴이 없다. 남편이 제일 잘하는 것 중에 하나는 어지르는 것 ( 그에 반해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은 정리하는 것, 이러니 우리가 천생연분일 수밖에! )이다. 그는 뭔가에 집중할 때 당이 가득한 초콜릿, 과자, 콜라 등을 주로 먹는데 그것을 책상 위에 그대로 두는 편이다. 다음 날 아침 책상의 상태를 보면 전날의 그가 했던 고군분투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러나 가끔씩 그것들이 휴지통이라는 제자리에 찾아갈 때가 있다. 그것을 뛰어넘어 음료를 마셨던 컵까지 예쁘게 설거지통에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다. 한창 제안서 마감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을 위해 집까지 일을 끌고 와서 할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바쁠 때 이런 변칙적인 모습이 보이면 더더욱이 놀랍다. 남들이 보통 말하는 '저 사람 뭘 잘못 먹었나?' 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경우라고나 할까.




"여보는 진짜 내 손바닥 안에 있다니깐!" 


이 말은 우리 남편이 내게 자주 하는 말이다. 나는 어떤 면에서 보면 남편보다 변칙적인 성격을 가졌다. 감정의 기복도 있고 어떨 때는 비논리적,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남편이라는 오선지가 있다면 나는 그 오선지에서 날뛰는 음표 같다. 어떤 날은 오선지 위에서 4분 음표로, 어떤 날은 8분 음표로, 어떤 날은 16분 음표로 하염없이 움직이고 날뛴다. 그러나 일상의 패턴에서만큼은 상당히 고요하다. 내게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루틴이 굉장히 많다. 살면서 '안정’을 매우 중요시하는 나는 삶에서 불쑥 나타나는 변칙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 계획을 하고 그대로 실행하는 편이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한다. 심지어 주말에도, 알람이 없어도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뜬다. 때로는 그런 내가 싫기도 하지만 말이다. 출근을 하기까지 내게 필요한 시간은 늘 한 시간이다.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한 한 시간은 언제나 동일하다. 잠들기 전에는 꼭 다음 날 입을 옷을 미리 꺼내 둔다. 필요한 액세서리와 가방도 준비해 놓고 그 가방 안에 소지품도 전부 옮겨놓는다. 다음 날 아들이 어린이집에 등원할 때 입을 옷도 미리 준비해 놓고, 잠들기 전에 아들이 다음 날 먹어야 하는 홍삼도 잊지 않고 식탁에 올려놓고 잠이 든다.


출근을 해서도 나의 루틴은 계속된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하면서 늘 역 앞에 던킨도너츠에 들러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사 먹는다. 계절에 상관없이 나는 늘 아메리카노만 마시고 한결같이 따뜻한 걸 좋아한다. 출근을 하자마자 지점장님 방에 들러 인사를 하고 자리로 와서 컴퓨터를 켠다. 여자 탈의실에 가서 가방을 두고 나와 책상으로 다시 간다. 내 책상 키를 꺼내 책상 문을 열고 깨끗한 책상 위를 업무를 위한 모습으로 변모시킨다. 책상 위에 놓인 텀블러와 빈 생수통 한 병을 챙겨 들고 탕비실로 간다. 빈 생수통은 자리에 놓인 생수통 가습기를 위한 거다. 늘 그렇듯 2/3 지점까지(하루에 딱 이만큼이면 된다) 수돗물을 채우고 내 텀블러에 따뜻한 물을 챙겨서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그렇게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퇴근 때까지 거의 99% 비슷한 모습으로 하루를 보낸다.




나는 성격 또한 굉장히 꼼꼼하고 세밀하며 완벽을 추구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다. 그냥 나 스스로를 많이 많이 괴롭힐 뿐이다. 되려 그런 꼼꼼함 때문에 사람들은 내게 많은 부탁을 한다. 은행에서 서류는 굉장히 중요하고 문제가 많이 발생되는 투자상품이야 말하면 입 아프다. 요즘은 전자서식으로 업무를 해서 종이서류가 많이 발생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끔씩 생기는 종이서류의 최종 발송 전, 상사에게 결재받은 서류는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최종적으로 내 점검을 받고 누락된 곳이 없는지 확인이 완료되면 담당자는 서류를 발송할 수 있다. 처음에 이 일을 내게 맡길 때 다른 책임자들도 있는데 왜 나한테 업무 하나를 더 주는 거냐며 불평했지만 모든 사람들은 이 일에 내가 적임자라고 했다. 내 확인을 받고 서류가 발송된 뒤부터는 반송률이 많이 줄었다. 그만큼 나는 더 피곤하기도 하지만.


어느 날, 내게 차장님이 말했다. "혹시 날짜방(날짜를 찍는 도장) 내일로 돌려놨어?" 무슨 말인지 몰라서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여쭤봤더니 차장님이 대답했다. "오후 5시가 되면 항상 날짜방의 날짜를 다음 날로 돌려놓잖아. 그런데 지금 오후 5:10분인데 혹시 바꿔놨나 해서. 안 바꿔놨으면 나 도장 하나만 찍어달라고 하려고." 그 정도로 나의 루틴은 다른 사람들이 알만큼 굉장히 지속적이고 일관적이다. 남편은 그렇게 루틴을 만들면 재미가 없지 않냐며 살면서 발생되는 변칙들이 인생을 더 즐겁게 하는 거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루틴 가운데 안정을 느꼈다. 퇴근을 하는 시각도 나는 늘 비슷하고 아이를 하원 후 집에 와서 잠들 때까지 늘 비슷한 패턴의 삶을 살았다.


나는 핸드폰이 있지만 시간은 늘 손목에 문신처럼 하고 다니는 시계로 본다. 내 손목시계는 10분 더 빠르게 맞춰져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 시계는 늘 10분 더 앞서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사실을 안 동료들은 굉장히 의아해했다. 왜 그렇게까지 시간에 쫓기듯 살아야 하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말했다. 아니, 이렇게 하는 이유는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내 삶의 10분의 여유를 두기 위해 이렇게 하는 거라고 말했다. 손목시계를 깜빡하는 일도 거의 없지만 혹여나 시계를 안 차고 출근하는 날이면 하루 종일 뭔가 불안했다. 출근하는 엘리베이터에서라도 그걸 인지하면 조금 늦더라도 다시 집으로 가야 했다. 시계가 내 곁에 있어야 하루가 계획대로 흘러간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곳에 입소한 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코로나 확진 문자를 받고 난 후 이곳에 입소하기까지 3시간 반이라는 시간은 정신없이 흘렀다. 당연히 이 곳에 들어올 때 내 손목시계는 내게 없었다. 306호가 나의 이름이 된 후로 내 삶도 완전히 바뀌었다. 물론, 입소하고 일주일 동안은 불안감과 우울감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하루 종일 눈물 흘리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그러나 이 곳에서는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 벽시계가 하나 있지만 그 시계를 볼 일도 거의 없다. 원한다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울 수 있고, 시간에 구애 없이 잠을 청할 수 있다. 유일하게 내게 시간 개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하루에 세 번 흘러나오는 식사 배식 관련 안내방송과 하루에 두 번 카톡으로 날아오는 자기 평가 기록지 문자다. 그 외에는 시간을 확인할 일도 확인해야 할 이유도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렸던 블라인드를 쫙 걷어올리고 문을 활짝 연다. 산이 선물해 주는 피톤치드를 온몸에 가득 넣어주고 싶다는 깜찍한 생각으로 큰 숨을 한없이 쉰다. 평상시에는 하라고 해도 하지 못했을 멍 때리기 시간을 한없이 갖는다. 가만히 나무들을 바라본다. 연신 자신의 몸을 흘러가는 바람에 맡긴 사랑스러운 나뭇잎 하나하나를 바라본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모습이 너무나 다양하고 제각각이어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살랑살랑, 팔랑팔랑, 반짝반짝, 일랑일랑, 내가 아는 온갖 단어들을 떠올리며 이파리 하나하나를 쳐다본다. 하루의 시작을 매일 QT로 시작한다. 말씀을 보고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이 좋다. 평상시 시간에 쫓겨 제대로 해 내지 못했던 일들을 이 곳에서 할 수 있어 감사하다. 조그마한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또 찾아본다. 친구가 택배로 부쳐 준 책도 읽다가 몸이 찌뿌둥하다 느껴지면 BTS의 신곡 'Dynamite'를 튼다. 빠른 비트와 디스코 팝의 노래가 막춤을 절로 불러일으킨다. 자리를 박차고 궁둥이를 연신 흔들어본다. 빠른 비트에 맞춰 내가 알고 있는 국민체조를 해 보기도 한다. 요가 매트라도 있으면 바닥에 앉아 필라테스라던가 명상이라도 할 텐데- 하는 아쉬움을 귀여운 나만의 춤사위로 풀어본다.


몸을 움직이기 위한 노동도 가끔 한다. 방 안에 준비되어 있는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가지고 나만의 방을 깨끗하게 치운다. 마포 걸레로 떨어진 머리카락과 숨바꼭질 놀이도 한다. 습도를 맞추기 위해 연신 수건에 물을 적셔 빨래 건조대에 널어놓고, 온도를 맞추기 위해 난방도 틀고 때때로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도 시킨다. 그러다가 잠이 오면 잠깐씩 잠을 청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두 남자와 영상통화를 하기도 한다. 가족들/친구들의 연락에 즉시 즉각 대답도 한다. 이곳에서 찾게 된 새로운 돌파구 브런치를 열어 매일같이 나만의 생각들을 쏟아내기도 한다. 최대한 인터넷은 하지 않는다. 세상의 뉴스에도 관심 갖지 않는다. 이 곳에서의 나의 관심은 오로지 '나'다. 내 자신이다. '내게 주어진 소중한 24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라는 고민보다 내 몸과 마음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인다. 내 마음이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모든 것이 즉흥적이다. 계획하지 않고 예측하지 않는다. 이 곳에서는 뜻대로 안 돼도 괴롭지 않고 계획대로 안 되었다고 자책할 이유도 없다. 시간의 구속에서 벗어난 이 곳은 그야말로 무릉도원이다. 살면서 다시금 내게 이러한 기회들이 주어질 수 있을까. 다시 만나기 힘들 것 같은 이 소중한 순간들 가운데 있다는 것이 가끔은 꿈꾸고 있는 것 같다. 몸의 상태도 점차 호전되고 있다. 가슴통증은 현저히 줄어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나는 내가 다시 온전히 회복될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친구가 보내준 책 가운데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라는 책이 있다. 굉장히 가벼운 책이라 금방 술술 읽히지만 매일매일 읽으니 똑같은 내용도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어느 날은 아무 감정도 주지 않던 글이, 또 다른 날은 진심으로 다가온다. 오늘의 내 마음을 두드린 글은 이렇다.

가장 좋은 것도, 가장 나쁜 것도
사실 별거 아니에요.
좋은 일, 나쁜 일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사실 인생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는
모두 사소한 일일 뿐입니다.
좋은 기억은 붙잡고,
나쁜 기억은 흘려보내요.
나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는 요소 중
하나가 기억입니다.
좋은 기억은 많이 남기고
나쁜 기억을 흘려보내면
행복한 나로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처음 이 곳에 입소했을 때는 내 평생 이런 최악의 기억을 갖게 된다는 것에 너무나 속상하고 서러웠다. 하지만 여기서 열한 번째의 날을 보내는 오늘은 이런 생각이 든다. 나중에 내 인생에서 오늘을 돌아보면 너무나 소중할 것 같다고.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있을 것 같지 않은, 돈 주고는 살 수 없는 그런 기회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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