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306호입니다.
내 비루한 몸뚱이를 싣고 구급차는 도로 위를 열심히 달렸다. 내가 위중한 환자는 아니다 보니 예상한 것과 다르게 사이렌 없이 조용히 굴러한다. 게다가 평일 낮의 도로는 한산하기 그지없다. 구급차 너도 참... 하얀 비닐을 뒤집어쓰고 하필이면 매일 같이 나 같은 사람을 실어 나르는 이 구급차의 운명 또한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놓고 나는 피식 웃는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불쌍하다고 하는 건지. 나 점점 이상해지고 있네-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확진 판정 이후 3시간 반 만에 찾아온 평화 속에 불안과 공포 가운데 조용히 떨고 있는 나 자신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이제야 온전히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게 된다.
그래, 나는 코로나 19 확진자가 되었어. 이제 이건 자명한 사실이야. 그러면 남편이랑 아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들의 코로나 19 검사 결과는 제발 음성이어야 할 텐데. 주말부터 마스크를 쓰고 있고 두 남자와 나름대로 떨어져 있는다고 있었지만 집 안 같은 공간 속에 있었던 것이 세상 후회가 된다. 그렇다고 그들을 양가 집으로 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친정아버지는 올해 암 수술을 하신 이력이 있는 기저질환 환자에다가, 시댁은 두 분 모두 회사를 다니시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리끼리 꽁꽁 싸매고 있었던 그 3일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 9월 내내 이사 준비다 뭐다 바쁘다는 핑계로 양가에 가보지도 못한 것이 내심 마음에 죄송하고 그랬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리 가족이 양가를 방문하지 않은 것이 이렇게 훌륭한 일이었다니!
그때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지난 금요일까지 나랑 같은 공간에서 일을 했던 나의 동료들 또한 내 연락 후 긴급하게 은행을 폐쇄하고 다 함께 보건소로 가서 코로나 19 검사를 받았다고 했다.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대면하는 은행원이라는 직업상 우리는 전우애로 뭉친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올해 초, 한창 코로나가 극심하게 퍼질 때부터 지금까지 서로의 안전함에 감사하며 매일 하루하루 살아있는 것과 일할 곳이 있어 감사함을 나누었던 직원들인데... 이 사태로 얼마나 두렵고 겉으로 말은 안 해도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하는 생각에 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상사는 아무 걱정 말라며 내 기분 풀어준다고 본인도 구급차를 딱 한번 타 본 경험이 있는데 그게 바로 술에 만취해서 3단으로 묶인 채 실려간 거라는 얼토당토 안 한 이야기로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웃기지가 않았다. 나도 내 인생에서 이것이 두 번째 구급차이긴 한데 지금 상황은 하하호호 웃기에는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어느새 구급차는 산속으로 들어와 어느 건물 앞에 정차했다. 서류 봉투 겉면에 적혀 있던 '차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 안에서 대기하세요.'라는 문구와는 다르게 바깥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문을 열고 나오세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작은 캐리어 하나를 손에 꼭 쥐고 차 문을 조심스레 연 뒤에 자같밭 위에 발을 내디뎠다. '휴-'하고 긴 한숨을 내 쉬고 난 뒤 고개를 드니 저 앞에 온통 하얀색의 방호복을 입은 여자 선생님 한 분이 나를 맞이했다. 그분은 최대한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또 한 번 나는 나를 직시했다. 그래, 나는 코로나 확진자지. 벌레보다 못한 것 같은 기분에 괜스레 위축되어 두 손으로 캐리어만 붙들고 있었다. 그 사이 나를 실었던 구급차는 소독 스프레이 샤워를 한 후 건물을 빠져나갔다. 아무런 편견 없이 나를 시트에 앉혀 준 구급차인데,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는데 이렇게 가버리네-라고 속으로 말하고 있을 때, 여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는 306호 방에 배정되셨어요. 이제 호출이 오면 올라갈 건데요, 저 계단을 따라 3층까지 올라가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가 없기 때문에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는데요, 캐리어를 들고 올라가시는 게 무거울 수 있으니 천천히 조심조심 올라가세요." 잠시 후 호출이 왔고 나는 혼자 발걸음을 하나씩 떼기 시작했다. 별로 넣은 것도 없는 캐리어인데 아직도 발열로 몸이 정상이 아니다 보니 조금 힘이 부쳤다. 밑에서는 선생님들끼리 무전하는 소리가 들린다. "OOO님, 3층에 거의 다 올라가셨어요. 곧 도착하십니다." 나는 3층이라고 쓰여 있는 문 앞에 섰다.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문을 열었다. 그곳은 회사의 연수원처럼 생긴 숙소였다. 나를 맞이한 건 하얀 방호복을 입은 여자 선생님이셨다. 그녀는 내가 배정받은 306호 앞에 서 있었다. 내가 한 발을 떼려고 하니 그녀가 말했다. "거기에 서서 들으시면 됩니다. 지금부터 제가 이 곳의 생활수칙에 대해 설명드릴 거예요."라고 말한 뒤 그때부터 그녀는 이곳이 쇼미 더 머니 랩 배틀 하는 곳인 양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갔다. ‘나는 너에게 얼른 나의 할 말만 하고 이곳을 떠날 거야!'라는 그녀의 속마음이 내게 읽혔다. 너무 빨라서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입력하는 것이 벅찼지만 쇼미 더 머니 애청자답게 나는 그것을 잘 이해했고 인지했고 소화했다. 그녀의 지시대로 나는 문고리에 걸린 명찰을 빼서 내 목에 걸고 문 앞에 놓인 봉투 하나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철컥! 나는 이제 저녁배식이 시작될 때까지 저 문을 열 수가 없다.
절대 열면 안 된다.
그것이 이곳의 생활수칙이다.
쭈뼛쭈뼛 방에 들어가서도 현관 앞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제일 먼저 베란다 밖의 초록 풍경이 보였다. 산속에 둘러싸인 곳이로구나, 그건 좋네-라고 생각했다. 비어있는 침대 2개와 그 앞에 각각 놓인 커다란 박스 1개, 그리고 아리수 생수통 6개씩과 커다란 휴지통 같은 것이 보였다. 손에 들린 봉투 안에는 이곳의 생활수칙이 적힌 종이 외에도 여러 가지 물품들이 들어 있었다. 아까 선생님이 한 말이 이 종이에 다 적혀있다는 걸 알고나니 그녀가 아까 왜 그렇게 빨리 말을 했는지도 이해가 됐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면 차근차근 하나하나 다 알 수 있는 기본수칙이니깐. 기본이 2인 1실이지만 306호 이 방은 내가 먼저 들어왔으니 편한 쪽을 사용하면 된다는 선생님의 말을 떠 올리고 베란다가 아닌 안쪽 침대를 골랐다. 박스를 뜯자 14일 동안 생활하면서 필요한 물품들이 들어있었다. (물품은 기본적으로 7일 기준. 부족하면 본인이 시켜서 택배로 받을 수가 있다.) 우선 나는 침대 커버와 이불, 베개를 뜯어서 펼쳐놨다. 집에서 가져온 물품들을 캐비닛에 정리했다. 목이 너무 말라 아리수 한 통을 뜯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책상에 놓여있는 기기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기기라고 해 봤자 혈압계 등의 의료기기. TV가 1대 놓여있지만 눈길조차 가지 않았다. TV도 마음이 평안해야 볼 수 있는 것.
대충 정리를 마치고 침대에 앉아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녹시율 200%의 광경. 평상시 내가 너무 원하던 모습이었는데 그 중심에 서 있는 내 모습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그제야 나는 실컷 울음을 터트린다. 정말 원 없이 엉엉 엉엉엉 꺼이꺼이 울었다. 내가 코로나 확진자라니. 왜 내가, 왜 하필 내가. 나는 방역수칙을 정말 잘 지켰는데, 마스크를 안 끼고 다닌 적도 없고 은행에서는 더 불안해서 마스크를 생명줄처럼 끼고 살던 나인데. 왜 내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에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다. 확진 문자를 받은 이후부터 줄곧 참아왔던 눈물이 터지자 멈출 줄 몰랐다. 나로 인해 폐쇄된 은행, 어린이집, 자가격리로 발이 묶여버린 사랑하는 두 남자, 이 소식을 접하고 정말 많이 놀란 나의 가족들, 나와 접촉된 사람들의 코로나 19 검사 결과가 내일 나온다는데 그 결과의 향방까지. 머릿속이 온통 까맣게 변하고 나 하나로 비롯된 지금의 이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한참 울고 나니 마음이 다시 제자리로 왔다. 그때 방에 들어올 때 받은 자료들이 보여서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사태가 국가적 재난이다 보니 국립정신건강센터_국가트라우마센터에서 이것저것 물품들을 다양하게 보냈다. <몸과 마음의 안정을 위해 함께 해 보세요>라는 책자에는 심리안정 용품 활용 안내와 함께 재난대비 마음건강 수칙 홍보 웹툰이 있었다. 그중에 짜증/불안 캐릭터는 나와 굉장히 닮아 있었다. '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냐고! 왜?!!!'라는 질문을 나도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긍정/희망 캐릭터는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어.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가 더 중요해!'라며 긍정적인 생각을 위해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나도 생각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지내는 14일을 슬기롭게 대처하자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의 감정 기복은 쉽게 평화를 찾지 못했다. 가족들에게 걸려오는 전화에 대성통곡하고 친구들의 통화에도 "왜 내가, 왜 내가, 왜 때문에~~~"를 외치며 분노하고 있는 나를 줄곧 발견했다.
내가 있는 이 곳은 생활치료센터이다. 경증 환자들을 위한 곳인데 이 곳의 1차 목적은 감염자들을 격리시킴으로 바이러스 전파를 막고 감염력이 떨어지는 시간을 두는 것이다. 약이나 치료를 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는 것. 하기사 아직 치료제 및 백신이 나오지도 않은 바이러스인데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게 더 이상할 터. 다만 여기에서 하루에 2번 9시/17시 스스로 자기 상태를 체크하여 의료진들과 매일의 상태를 점검한다. 증상 체크에 필요한 혈압계, 산소 포화 측정기, 체온기 등의 기기도 혼자 다뤄야 한다. 입소하면 의료진 선생님이 카카오톡을 보내주시는데 거기에 동영상으로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어 기계치여도 누구나 할 수 있겠다 싶다. 증상이 심해지면 약을 처방받고 상태가 안 좋아지거나 하면 인근 대학병원으로 전원을 가는 형태이다. 어찌 보면 14일간 이 곳 생활치료센터에 있다는 것은 상태가 나빠지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겠다. 하루에 식사를 배식하는 8시/12시/18시 외에는 현관문을 열 수 없다. 베란다에 나가는 것도 안 된다. 마치 자가격리처럼 이 공간에서만 오롯이 지내야 한다. 내 방 밖으로는 숲에 가려진 절이 하나 있다. 목탁소리로 알았다. 그리고 그 앞에는 경찰차가 서 있다. 경찰 2명이 하루 종일 그곳에 있다.
어느 정도 울고불고하며 이 곳을 정리하니 마음도 한결 차분해졌다. 저녁 배식이 곧 시작될 거라는 안내방송이 울렸다. 배식이 종료된 후에 식사를 가져가라는 안내방송이 나와야 현관문을 열고 문 앞 탁자에 놓인 식사를 들고 들어올 수 있다. 편의점 도시락이었다. 입맛이 전혀 없어 몇 입 먹지도 못 하고 이곳에서의 첫 끼니를 종료했다. 쓰레기는 하루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만 밖으로 배출할 수 있다. 폐기물 쓰레기 비닐에 온갖 쓰레기를 넣고 소독제를 뿌린 뒤 폐기물 의료 통 속에 꼭 넣고 뚜껑을 완전히 밀폐하여 다시 소독제를 뿌린 뒤 매일 13:30분까지 현관문 앞에 놓는다. 그 전 점심 배식 때 새로운 통과 교체된다. 이것이 이곳의 생활수칙. 여기에서조차 사람의 모습을 만날 수는 없다. 가족들은 마음 편하게 먹고 있으라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다. 아직까지 뭐가 뭔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고 마음의 불안으로 쉽사리 잠도 오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자꾸 우울모드로 데리고 가는 불안의 단초는 내일이면 결정될 판정 결과의 문자이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의 결과, 나와 함께 일했던 모든 직원들의 결과, 어린이집 모든 선생님들의 결과. 그 결과가 어떻게 되냐에 따라 또 시나리오는 각각 다를터. 제발 제발 음성이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밤새 낯선 침대 위에 누워 뒤척였다. 어떤 걸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은 감고 있지만 내 정신은 계속 뭔가를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치료센터에서의 첫째 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