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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Nov 24. 2023

빌런도 두 말 할 권리가 있다

조 내버로, 마빈 칼린스, 『FBI 행동의 심리학』


얼마 전 챗봇 시나리오를 작성하다 답답함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치 구남칰과 대화하듯 방향감을 상실한 듯한 대화플로우며, 담당자가 보내온 디렉션에 따라 실제 화면에 접속해 보니 용어는 물론이고, GNB 위치며 CTA 명칭까지 하나도 일치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담당자가 보낸 초안에 따르면 UX는 매우 간편해 보였고, 이미 임원 보고까지 마친 단순 작업건이었으나 나는 왠지 내가 화려하게 잘 굴러가는 테마파크에 홀로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고 광광 우기다 무고죄로 고소당한 시민 같이 느껴졌다. 민감한 법적 이슈를 다루는 화면이었기에 단순 홍보 안내이거나 일반인에게 접근 가능성이 높은 분야가 아니었으므로, 작업을 하는 일주일 동안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건 담당자의 불친절한 자료 때문일까, 아님 나의 전문지식이 부족한 걸까? 아니, 지금 여기서 나만 불편한 거야?


일반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매스 프로모션부터 특정 타겟을 잡으려는 히든 프로모션, 그 밖의 공지성 안내나 신청/접수 절차 안내 등 화면설계건부터 LMS, 앱푸시 같은 소규모 채널까지 모두 담당하며 다양한 분야의 (인간군상들과) 담당자들을 접한다. CS팀은 물론이요, 법무팀과 … (팀 설명이 구체적으로 나오면 내가 소속된 범위가 좁혀질 것 같으므로 생략하겠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많이 부딪히는 쪽은 마케터들인데, 자극적인 워딩과 면피성 멘트를 좋아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면 나는 때로 ‘체리피킹’이라 불리우는 진상 고객이 되어 콜센터 직원으로 둔갑한 마케터와 상황극 놀이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고객 역시 면피성으로 혜택을 요구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거다. 한국어는 끝까지 들어야 한다지만 직관적이고 단순한 영어와 달리 한국어의 특징이란 조사 하나만으로 뉘앙스가 분명히 달라진다. 그런 가운데 어떤 담당자들은 작업건의 퀄리티와는 관계없이 기한 내에 작업을 마쳐야 한다는 시계토끼 역할에 몰두한 나머지 ‘이상한 나라의 UX’로 침몰되고 있음에도 일!단!오!픈!에 방점을 찍고 나면 뒤의 책임은 UX팀에게 넘겨 버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인사 평가와… 실적을 위해.. 늘 이들과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일을 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바로 이거다. “왜 한 입으로 자꾸만 두 말 하세요?”


 그럼 너는 쬐끔한 게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 왜 그렇게 불만이 많느냐.. 라고 묻는다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뭐하지만 원래 인간은 불만이 많은 짐승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늘 이유가 있다. 나는 그걸 ‘불만’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욕구가 만족된 인간은 행동하기보단 침묵하기를 택한다. 현재의 평온함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평온함’의 상태란 마치 설익은 얼음 같아서 언제고 금방 깨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마치 갓난아기의 평온함이 쉽사리 찾아오지 않듯, 그래서 인간은 늘 굶주리거나, 욕망하는 상태에 빠져 있다. 소비자의 입장이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대부분의 소비자는 한국어의 ‘어’ 다르고 ‘아’ 다름을 관대하게 이해해 주는 편이기 때문에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세상의 이치를 받아들이듯 그러려니 하며 지나가지만 결코 적지 않은 이들은 ‘끝까지 간다’ 의 정신을 고수하며 정말 법정 공방까지 가곤 한다. 그러니까 조사 하나하나 따져보며 진상이 되어 보는 것이 UX라이팅을 하는 데 있어 그동안 내가 지닌 비법 중에 하나인 것이다. UX를 볼 때는 단순히 직관적이고 접근이 편리한 쪽으로만 고려해서는 안된다. 짜증으로 뒤범벅된 성정으로 세상 모든 불만을 간직한 채 내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톤앤매너를 어떻게 바꾸는 것이 효율적인지, 혹은 UX라이팅의 문제가 아닌 기획 단계에서의 수정이 필요할 수도 있음이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개발자고 기획자고 꿈쩍을 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은 풀리지 않은 해결을 UX라이팅에서 하게 된다)


『FBI 행동의 심리학』은 이러한 ‘불만’과 ‘생존’에 대해 익숙한 지점들을 짚고 있지만 UX에 대입해 보자면 낯설은 지점들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책이다. 지금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앞서,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다 잡아 놓은 소비자를 어떻게 끝까지 이탈하지 않게 만드는가?’에 있다. 멀끔하게 보이는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우선 해당 기업 또는 브랜드에 애플리케이션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신뢰를 느끼겠지만 반복되는 로딩 실패와 원했던 경로와 실제 노출된 화면이 달라질수록 피로감을 느낀다. 게다가 빌런 같은 마케터들의 요청으로 시도 때도 없이 노출되는 마케팅성 팝업의 범벅은 기력소진을 넘어서 때로는 타오르는 분노가 되기도 할 것이다. 6장의 <상대방이 불편해하는 것을 어떻게 알아챌까?>만 해도 이와 같은 사례가 언급되어 있다. ‘인간은 함께하고 싶을 때 인사를 하지만 곧 대화나 상황이 못마땅하면 가까운 출구를 찾는다.’ 작가는 대화를 하는 중에 타인의 몸짓이나 말투만으로 다음 상황을 예측해 볼 수 있다고 언급한다. UX 역시 일대일의 대화, 평면적인 소통이긴 하지만 결국 작업자와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우리와 대화를 하려는 고객들은 대부분 머리가 하얗게 비어 있고, 우리는 새로운 정보를 주입시키거나 그들이 알고 있는 일부 정보를 통해 새로운 대화를 이끌어내야만 한다. 한정된 시간에 모든 걸 알려 주고 싶은 마음에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TMI이자, 상품의 매력을 한껏 어필하는 ‘플로팅’ 팝업을 띄울 경우, 고객은 가차 없이 출구(철벽)를 찾을 것이다.


 8장의 <거짓말하는 사람은 두 번 강조하지 못한다>에서 언급된 수동성과 동시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인상적이었다. 단순 마케팅성이 아닌 민감도가 높은 신청 화면이나 동의 화면의 경우에는 UX라이터인 입장에서는 최대한 고객이 그들로 하여금 생소한 전문 용어나 프로세스에 대해 인지할 수 있게끔 직관적이고 친절하게 안내하고 싶으나 함께 검토를 진행하는 마케터나 최초 화면 설계자의 경우에는 각자의 이익만큼 의견 차이를 좁히기가 매우 어렵다. 용어가 달라 혼란스럽다는 의견을 주고받으면 ‘일부러’ 그렇게 진행하고자 한다는 의견이나 화면에서 정확하게 안내하지 않더라도 신청자들은 암암리에 해당 용어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이슈가 없다는 답변을 받거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같은 질문을 시간 차를 두고 두 번을 하면 전혀 다른 결과와 답을 받을 때도 부지기수다. 그러니까 내가 자주 하는 질문은 ‘왜 한 입으로 두 말 하나요?’이고, 담당자의 입장에서 ‘우린 입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두 손으로 말하니까요.’다. 이는 달리 말하면 마케터의 입장에서는 본분을 다하며 소비자의 행동심리를 파악한 다소 짓궂은 보이스이기도 한 것이다.


UX라이팅의 본질은 법적으로 ‘광고성이 아니지만 소비자의 행동심리를 파악하여 이용을 유도’하는 데 있다.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데는 물론 매력적이고 효용성이 뛰어난 가치를 어필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그 밖에도 소비자의 마음이 ‘UX’라는 미로에 갇히게 만들도록, 다른 곳에는 시선조차 두지 못하도록 장악하는 방법도 있다. ‘동의하지 않으시면 지금부터 계속 이용할 수 없어요.’라는 아쉬움이 가득 담긴 멘트라거나, 해지 버튼 앞에서 ‘예’, ‘아니오’의 순서를 교묘하게 바꿔치기한다거나 ‘고객님께만 제공되는 혜택이에요.’라거나 ‘종료를 누르면 다시 누릴 수 없어요.’와 같은 보이스로 말이다. 특히 매달 진행되는 행사의 안내문을 매번 다르게 써야 한다고 한다면 내일 회사가 망한다는 걸 나만 알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단어와 문장은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이처럼 UX라이팅에서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행동심리를 먼저 파악하는 것.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 UX라이팅을 FBI라이팅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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