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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Dec 01. 2023

작은 맘씨들

임지은, 『헤아림의 조각들』

나는 작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 내가 낯선 이에게 말을 곧잘 건넬 수 있다고 해서, 내 몸집이 크다고 해서 마음마저 넓은 것은 아니다. 나는 신이 아니고, 너른 호수가 아니며, 불굴의 의지를 지닌 마법사도 아니다. 그러니 내게 관용과 자비를 기대한다면 그건 나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거다. 나는 쉬운 일도 어렵게 고민하고, 사소한 걱정을 무한하게 부풀려 시름시름 앓기도 하는 평범한 인간. 때로는 비겁한 변명으로 나를 보호하는 옹졸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의 작디작은 마음씨는 개복치 같다. 누군가의 따스한 말 한마디에 쉽게 마음을 내어주고, 벅찬 감상에 빠지기도 한다. 결국 마음이 무너지는 속도 역시 헐겁다는 말이다. 그걸 곱게 포장하면 일희일비라고 했던가. 내게는 조금의 카피워싱이 필요할 것 같다. ‘만희만비’라고.

 

“내가 너무 설렜던 것 같아. 여름 동안 나는 우리 모임 사람들이 벅차게 좋았어. 그래서 마음이 미쳐 있었던 것 같아. 어른답지 못하게.”

 

최근에 함께하던 모임 사람들에게 건넸던 말이다. 여름 동안 나는 나답지 않은 계절을 보냈다. 여름휴가를 제대로 떠나지 못해서인지 감정이라는 해변에 내 마음을 이리저리 휩쓸리게 놔두었다. 나는 그 물결에 몸을 맡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온통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거다. 눈과 코와 입으로 쉴 새 없이 몰아쳤던 부정한 기운들은 한여름에 걸린 감기처럼 내 몸과 마음을 쉽게 장악했다. 내게도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일에 대한 의욕도, 취미생활이며 관심사가 즐겁지 않은 감각. (대식가인 내가) 입맛이 없어 볼살이 쏙 빠져버릴 정도였으니 피서지로 감정의 물놀이는 제격이었던 것 같다. 물놀이를 빠져나온 후엔 누구나 그렇듯 허기가 졌는데, 나는 그것을 다른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을 쉴 새 없이 만나는 것으로 채우려 했다. 채워지지 않았지만.

 

올 초 처음으로 ‘모임’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모임’에 대한 후기를 검색하면 삶을 충만하게 해 준다는 후기와 시시했다는 후기로 반반 나뉘어졌다. 내게는 낯선 타인을 만나는 일이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당시에는) 확신하고 있어서 모임이 시작되기 전부터 몇 번이고 탈퇴와 가입을 반복하며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망설였다. 네 번이었던가, 다섯 번이었던가. 하지만 용기를 내어 만나게 된 사람들, 내게는 운명 같은 사람들, 그렇게 만나게 된 사람들은 너무 다정한 친구들이었다. (돌이켜보건대 그 모임에 있던 사람들은 한 명 한 명 사랑스럽고 귀엽고 소중해서 나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내 첫인상이 다소 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즈니스 미팅이나 인터뷰 때 대화를 나누면 날카롭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나는 내가 감정에 퍽 둔한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 마음의 표현은 늘 한 발짝 늦게 시작된다. 세 번째 모임이 끝났을 때였던가. 나는 내가 이들 한 명 한 명을 내 마음에 담아두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늘 나 홀로 마음이 벅차 있었던 것 같다. 자꾸만 장난을 치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가능하다면 한 달에 한 번씩 계속해서 책을 읽어가며 겹겹이 세월을 쌓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여름에 나는 그 사람들이 그 정도로 좋았다. 24시간으로도 모자란 내 시간을 쪼개고 쪼개 만나서라도, 만나는 장소가 서울 한복판이 아닌 시골 촌구석이더라도 그 시한부 같던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먼 동네로 전학을 가야만 했던 초등학교 시절을 제외하고는 중학교 친구들,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과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다. 그뿐이랴,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회사 동료들, 셰어하우스를 함께 지내왔던 룸메이트들과도 종종 연락을 하고 얼굴을 맞대며 지낸다. 모두들 나와 함께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나눈 사람들이다. 우리는 내밀하지는 않지만 짧은 인연에 친밀하게 서로의 속사정을 들여다본 사이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어쩌면 이곳에서도 그런 관계가 가능하지 않을까, ‘모임’이라는 일회성의 프레임을 떠나 인간과 인간이 마주하는 일들이니까 그런 반가운 관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늦은 밤까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들어주며 언젠가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 사이가 이렇게 오래됐구나 하는 관계가 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단톡방이 늘 활성화되지 않아도 좋았다. MBTI로는 E인 나의 성격과 대조되게 그 모임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I’였으므로, 그런 경우에는 ‘E’가 ‘I’를 자꾸만 불러내 주면 돼. 나도 용기를 내는 건 쉽지 않지만, 내가 용기를 더 내볼게, 하고 애써 씩씩한 척 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일정량의 재화를 주고받고, 의무감으로 지속되던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의 현실은 다르다.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 같았던 관계는 점점 옅어져 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람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와 같은 결의 사람들은,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편이니까. 그래서 멤버들 한 명 한 명에게 종종 연락을 하며 사소한 안부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내 쪽에서 먼저 시작되는 관계였다. 언제고 내가 연락을 멈춰버리면 끊어지는 관계들. ‘그래도 괜찮아, 더 좋아하는 쪽이 먼저 연락하는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내 마음은 본래 지닌 성정의 유속을 이겨내지 못한 채 빠르게 지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건네는 안부와 연락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은 내 연락 따윈 원하지도 기다리지도, 오히려 귀찮을 수도 있는데 ‘언제 봤다고.’그 다섯 음절이 내 머릿속을 크게 울려댔던 날, 나는 ‘우리 다음에 한번 보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우린 삼십 대. 더 이상 방과 후에 종종걸음으로 모여 떡볶이를 노나 먹던 청소년이 아니었다. 각자의 밤과 개인의 삶이 분명하게 존재했고, 스스로를 챙기는 일도 버거운 어른이었다. 인간관계란 무엇이든 한쪽만 노력해서는 성립될 수 없는 거라는 걸. 나는 이제서야 깨달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종종 생각이 나던 사람에게 (몇 번이고 고민하다) 연락을 보내는 일을 멈춰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는 내 마음을 헤아려 달라고, 내가 이렇게 네가 좋다는 말을 던지기에 급급한 나머지 정작 타인의 마음은 어떤지 그 사람의 생활이나 진심은 어떤 것인지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이만큼 예의 없고 민폐인 행동이 어디 있을까!

 

임지은 작가의 『헤아림의 조각들』은 거의 무너져 가는 마음의 궁전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살아남은 누군가가 제 몸보다 큰 양탄자를 들고나와 유쾌하지 않은 감정의 먼지들을 툴툴 털어내는 책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양탄자를 털 때는 ‘탈탈’이나 ‘털털’이 아닌‘툴툴’이라는 거다. 여기엔 사소한 차이가 있다. 그녀가 꺼내놓은 이야기엔, 진심과 진실로 가득한 이야기 속엔 명쾌하게 해결되거나 봉합될 수 있는 일들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인지 각각의 에피소드가 마무리될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완성되지 않은 느낌, 부러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 ‘이렇게, 이렇게, 해!’하고 오지랖을 부리고 싶어지기까지 하지만 실은 나였더라도 작가와 같은 결론에 다다랐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삶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지만 우리가 한 시절을 살아내는 일이란 감정이라는 해변에서 로딩 시간이 없는 서핑을, 보드 위에 두 발을 붙이고 선 채 무게중심에 힘을 빡 주고, 파도를 넘고 허우적대기도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책을 읽으면서 특히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거기에 있던 나의 무화과」였다. 아티스트인 동생이 회사의 대표로부터 심각한 외모차별-성차별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을 당했을 때 작가는 동생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부던히 (말로) 애쓴다. 우울을 앓기 시작한 동생을 위해, 주체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지켜내야 한다는 간절한 외침은 결국 법정 공방에서 ‘승소’라는 결과를 얻어냈지만 원했던 결과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는 다르다. 때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필요한 것은 진심, 진정한 사과, 그리고 반성인데 세상에는 정직한 사람만큼이나 못난 사람들도 수두룩해서 끝내 상처의 본질을 제대로 손보지 못한 채 끝나 버리기도 한다. 작가는 이를 멋대로 간절하게 돌본‘무화과 화분’에 빗대어 어떤 본질은 “자신에게 유일한 형태로 기억하고 또 잊으며, 읽고 쓰고 말했던 것은 아닌지 / 내가 얼마나 나 좋은 것만 믿고 싶어 했는지”(p.37)라는 문장으로 감각한다.

 

「그저 당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SNS에서 처음 관계를 맺었던 ‘D’에 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내가 최근에 모임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성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차라리 피상적이고 느슨해서 따뜻하게 느껴지던 편안함, 척박한 내 삶에 새로운 우정이 싹틀 가능성과 비로소 이해받는다는 안정감, 거기에서 받았던 흥분과 감각이 매번 나를”(p.92) 이끌었다는 부분이 충분히 공감되었다. 비록 내가 만난 사람들은 온라인 친구들은 아니지만 나는 어쩌면 새로운 자극, 새로운 사람들이라는 도파민에 일정량으로 중독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동질성을 바탕으로 친분을 쌓고, 서로에게 좋아요를 남발하거나 이따금 호들갑을 떠는 식으로 무관심을 은폐”(p.93)하는 관계를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나고 보면 나 역시 잘 모르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진심이 아닌 마음들을 남발하거나 이따금 호들갑을 떨며 좋은 사람인 척 연기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과 친분을 쌓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태도, “나는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의식할 뿐이지 않나. 동질성으로 맺어진 사이란 오히려 조금의 다름도 못 견디는 사이를 뜻하는 건 아닐까. 얼굴 한 번 안 본 사람을 고작 터치 몇 번으로 안다고 말해도 괜찮은 건가. 온라인의 관계란 무엇인가를 감수하기보다는 친밀함을 쉽게 채워버리는 데 그치지는 않나”(p.220)하는 생각들 마저도 최근까지도 나 역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던 부분이었다. 작가는 이 관계에 대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안타까움과 무력감, 그리고 기묘한 친밀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외에도 나를 피식하게 웃게 만든 구절들이 많았다. 특히 “페미니즘, 애인, 비혼, 비건, 퀴어 같은 말을 쓰는 여자 그리고 고양이를 키우는 여자는 피하라”(p.41)라는 이 무지막지한 문장에서, ‘사람들은 섹스를 싫어하는 여자도, 섹스를 좋아하는 여자도 멸시합니다. 한쪽은 괘씸하고 한쪽은 천박하다니요.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여자도, 아이를 낳겠다는 여자도 멸시합니다(p.111)라는 어처구니없는 문장에서도 진부함을 느끼는 동시에 한 번씩 열불이 터져서 나름 으스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독서 근력이 조금 힘에 부쳤던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나는 모임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물론 그것 역시 내가 사람들에게 한 명 한 명 연락하고 부추겨 다소 강제적으로(?) 만나게 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나의 솔직한 마음들을 털어놓았다. 그날 나는 그 사람들을 앞으로 다시는 못 볼 거라고 단정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 마음이 지금 어떤지, 내가 여름 동안 너희들에게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를 털어놓았다. 성격이 급한 나는 ‘툴툴’이 아닌 ‘탈탈’. 정말 탈탈 털어놓았다.

 

“너희들은 진심을 치장하는구나. 그걸 배려라고 여기는 거야. 그렇지? 여기서 나만 진심이었던 거야.”

 

그런 모진 말들을, 서슴없이 뱉었다. 실은 멤버들의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당시 나는 내게 겹쳐왔던 여러 개의 감정들을 멋대로 흩뿌려버렸다. 어차피 다시 안 볼 사람들일 테니까. 그날 나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서 후련했지만 집으로 돌아왔을 땐 그 찰나의 일들을, 내가 뱉었던 말들을 모조리 후회했다. 그렇게 그들과의 관계가 끝이 나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집으로 들어가 발을 닦고 자려던 시각에 멤버 중 한 명에게 연락이 왔다.

 

‘아니야, 민정. 우리 I들은 E인 네가 연락해 줄 때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구.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

 

그 밤에, 다정하고 사려 깊게 내 마음을 헤아려 주었던 그 친구의 (역시나 인사치레일지도 모를) 한 마디가 나를 조금 울렸다는 사실을 그 친구는 알까. 뿐만 아니라 며칠 전엔 나를 항상 귀엽게 여겨 주던 언니에게 무려 먼저! 연락이 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먼저 내게 다가와 마음을 내어 준 언니. 한 가지 디자인의 옷에 색깔만 다르게 입고 다니는 패션 테러리스트인 나와 다르게 언니는 매우 패션 센스가 있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나보다 문학에 대한 깊이나 앎이 방대해서 얇은 텍스트 속에 담긴 의미를 함께 해석해 보는 재미가 있다. 언니는 늘 속 좁은 나를 좋게 봐준다. 나의 어떤 면을 좋게 보는지, 내가 마음이 속상할 때마다 자신이 악당이 될지언정 내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는 고마운 친구다. 그리고 심지어 여자인 내가 봐도 너무 예쁘기까지 해! 그날 언니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평소 터널을 무서워하는지라, 꼭 필요하지 않을 때면 지하철을 잘 타지 않는 편인 데다 생각이 많을 땐 2시간에 가까운 거리도 걷는 편인데, 할방 친구와 셋이서 실껏 수다를 떨고 헤어지는 길에, 언니는 내가 시장을 지나고 대교를 넘는 동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다음엔 속 끓이지 말고 나한테 편하게 연락해.’하고 말해주어서 너무 기뻤다. 앞으로 모임 사람들 앞에서 나대는 일(?)을 자제하고 원래의 성정대로 돌아가기로 한 다짐이 무색하게, 추석 연휴에도 내게 먼저 안부를 물어준 쪽은 언니였다.

 

여름 내내 내게 웨이크보드를 적극 추천했던 앵두 같은 그 친구는 또 어떤가. 그 애는 (일단) 나보다 동생이지만 옹졸하고 치사한 나와 다르게 속이 참 깊은 친구다. 나는 사회성을 글로 학습하고(?) 때로 다정함과 사려 깊음을 연기한다면 그 친구는 진심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움직이고, 그래서 그 모습이 참 예쁜 친구다. 얌체 같았던 첫인상과 다르게(예쁘다는 말이다) 활동적이고 모험가 기질이 있던 그 친구는 내게 늘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참, 생각해보니 내가 힘이 들 때, 갑자기 내게 먼저 연락이 와 잘 지내고 있느냐고 안부를 물어준 것도 그 친구였지. 추석 동안엔 그 친구가 거의 출근한다는(?) 웨이크보드를 타러 갔는데 핸들을 잡고 겨우 일어서는 나와 다르게 그 친구는 과장을 좀 보태자면 물 위에선 적어도 김연아였다. 여러 사람들이 타는 걸 봤지만 그 친구만큼 정석대로 진짜 멋있는 자세로 타는 사람을 못 봤다. 그 친구는 내가 머물렀던 3일 동안 자신의 장비만 챙기는 것도 번거로웠을 텐데 나를 많이 챙겨주었고, 물 위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어떤 게 팁이 되는지, 이리저리 물을 먹으며 허우적거릴 때도 민망하지 않게 열심히 응원까지 해주었다. 그 친구에게 이상하게 의지가 되어서 가장 솔직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지.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그래서 또 고마웠다 엉엉)

 

모임장 언니는 또 어떤가. 어쩌면 내 마음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언니의 몫이 아주 큰 지분을 차지할 테다. 언니는 처음 봤을 때부터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첫 모임 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표현한 배경들은 마치 수채화로 그려진 풍경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내가 한국문학에 진심이라면 언니는 해외문학에 진심인 듯 보였는데, 그래서 어느 날엔 문학사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으로 반대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신경전(?)을 벌였던 것도 좋았다. 좋은 사람. 솔직함에 충실한 사람. 언니는 (아마 본인은 내가 얼마나 자기를 짝사랑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법을 알려주었다.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고 있는 것과 사회성이 있다는 건 조금 다른 이야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MBTI 검사를 10번을 했지만 나는 너무나 확신의 ENTJ고, 엔티제의 사회성은 사람이 아닌 일의 효율에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테다. 나는 언니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좋은 사람들을, 그 세계를 천천히 헤엄쳐 갈 수 있었다.

 

우리 중에 최연장자인 친구는 또 어떤가. 두 번째였던가, 세 번째였던가. 멤버들끼리 평어를 쓰기로 했을 때, 한때 내가 심하게 덕질을 했던 신하균 배우님보다 초큼 어린 그 친구에게만큼은 평어를 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사실 지금은 다시 평어를 쓰지 않는 방향으로 돌아가 버린 유일한 친구다) 처음엔 부장님 같고, 교수님 같고. 그래서 낯을 많이 가렸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편해졌다. 나보다 더 어른이라는 몸피 속에 그의 마음은 어쩌면 나보다 더 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사실 나는 눈치가 빠르고 능력 있는 엔티제라서 상황 파악이 빠르고 쉽게 되는 편인데, 유일하게 그 친구에게 나의 비밀이 원치 않게 들켜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만일 이 글을 보신다면 저 이제 다시 원래의 민정으로 돌아왔으니 모르는 척 해주세요. 헤헤.

 

그밖에도 명상과 철학광인 것 같은 막둥이 두 멤바, 여름엔 만두와 녹두전을 먹었고, 조만간 낙지볶음을 먹자는 또 다른 회사 근처의 멤바, 툴툴 대면서도 사람들을 좋아하고, 장난기도 호기심도 많은 사촌 오빠 같은 멤바, 첫째길래 어른인 줄 알았더니 말을 걸어볼수록 철없는 막내 같은 답만 들려주고 함흥차사인 멤바와 몇 년 뒤에도 모임을 유지하자며 멀리 떠나 바게트 바삭 소리를 들려준다더니 딴 이야기만 전해 들었던 멤바까지 각각의 친구들은 들여다볼수록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귀엽고 소중해서 더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애초에 내가 생각했던 글의 분량의 2배를 넘어버려서 이만 줄여야 할 것 같다. 언젠가 어디엔가, 이런 이야기를 실컷 풀어버리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그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몹시 고백하고 싶었다.

 

친구들의 말이 진심이든 거짓이든 이제는 상관없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인사치레로 흘러가는 언어의 맥락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을 잔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마음을 무덤덤하게 다듬을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도 알겠다. 일부러 나를 피한다거나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한다. 세계의 규칙은 여전하겠지만 그래서 이젠 그저 고마운 것뿐이야.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이제서야 편하게 한다. 그럴 수 있게 되었다. 웃음이 난다. 내 마음의 이력은 이렇게 뭉치고 풀어지며 서서히 쓰기 좋은 근육이 될 것이다. 두루 친구들의 안온한 마음처럼 타인을 헤아리고, 다정하고 사려 깊게 타인으로부터 헤아림을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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