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어느 작가의 오후』
최근에 나는 남들에게는 하지 못하겠고, 어딘가에는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소설로 썼다. 소설로 쓴 후에는 함께 수업을 듣는 사람들과 선생님에게 보여주어야 했는데 나의 지극히 사적이고 부끄러운 이야기를 나를 기억할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것은 역시나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내가 아닌 척 굴며 남에게 내밀한 이야길 시시콜콜 털어놓는 건 아무래도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하기 쉬운 것이니까.
그런 마음을 담아 소설을 썼다. 이야기 속 주인공 ‘나’는 모임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인 ‘A’를 짝사랑하고 있다. A와 나는 인프제(INFJ)로 지극히 내향적인 캐릭터지만 직업적으로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A는 나와 다르게 처음 보는 사람들과 쉽게 말을 트고 잡다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이를테면 자기가 사는 동네에 모여 있는 포장마차들의 붕어빵 식감에 대한 비교라던가 회사 근처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들, 혹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속 깊은 고민들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그러다 우연히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아 나는 A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게 되는데 여기서 A는 뜬금없이 나에게 자꾸만 ‘K’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처음엔 K라는 사람을 본 적도 없거니와 술에 취하기만 하면 왜 자꾸 그녀가 그의 이야기를 나에게만 꺼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으나 이내 나는 A가 K를 좋아하는 마음을 아무에게라도 들키고 싶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중에 가장 만만한 사람이 나로구나. 내가 제일 멀게 느껴져서 내게 고백하는구나, 라는 걸 인지한 순간 나는 조금 울적해진다. (그렇지만 결말은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나’와 A가 사귀게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스콧 피츠제럴드’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쩐지 내게는 연륜 있는 할아버지 작가 같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어른스러운 작품만을 쓸 것 같은 사람. 언젠가 보았던 영화에서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가 카페에 앉아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었다. 근사했고, 나는 그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고뇌에 빠진 창작자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의 데뷔작인 『낙원의 이편』과 그의 대표작인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 글쎄, 다소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전형적인 ‘철없는 30대 남성’만이 쓸 수 있는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비난이 아니다. 그 나이대에만 보여질 수 있는 피츠제럴드의 사유와 시선을 귀엽게 보고 있다는 뜻이니까.
이후로 나는 1920년대 뉴욕에서 가장 솔직한 작가를 떠올리면 곧바로 피츠제럴드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감정에 솔직한 사람. 우울할 땐 한없이 절망에 빠졌고, 기쁠 땐 쾌락에 중독되었으며 자신의 잘못과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작품으로 그려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신의 경험과 그로 인해 얻은 사유를 작품으로 풀어낸다면 피츠제럴드의 작품은 그의 세계관 자체가 리얼리즘 같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피츠제럴드는 쉬운 남자다.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단숨에 파악이 되니까.
또한 그래서 그는 인간적인 작가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엮은 『어느 작가의 오후』 속 여덟 편의 소설과 다섯 편의 에세이는 아마도 하루키가 생각하기에 가장 인간적인 그의 작품들이 모여 있다. 피츠제럴드의 이런 면면들이 특징적으로 부각되는 작품들 속엔 실제로 그가 당시 작품을 발표하던 때에 경제적인 상황이나 작가로서의 고뇌, 그리고 그의 아내였던 ‘젤다’와의 에피소드가 군데군데 녹아 있는 듯하다. 재밌었던 부분은 그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는데 특히나 그는 ‘젤다’와의 결혼생활 동안 여자의 심리에 대해 단단히 질려 있으면서도 이때 가장 어른으로서 성장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작품만 꼽아 이야기를 나누기에 아쉬움이 많지만 표제작인 「어느 작가의 오후」를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다.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도 많은 공감이 되었던 이야기다. 작품 속 주인공 ‘나’는 작가로, 작품은 마음처럼 잘 써지지 않고 구상하는 이야기는 헐겁기 그지없어 발표하기에 적절치 않다. 그러나 현실과 생계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소설을 써내어야 한다. 그는 골치 아픈 생각들을 뒤로 한 채 짧은 외출을 한다. 길을 걷는 동안 한때 학교에서 수업을 듣던 시절도 떠올리고, 이발소를 지나가며 그곳을 배경으로 썼던 소설도 떠올린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소설로 써내어야겠다는 낙관적인 시선으로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은 마치 피츠제럴드의 일기장 같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당시 그가 처한 상황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굳은 결심으로 보이기도 한다. 작품 말미에 그는 작가의 ‘재능’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도 같은데 피츠제럴드는 스스로가 재능 대신 노력으로 작가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쪽이든 나는 그가 대견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에세이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은 아무래도 「망가지다」였다. 처음 이 글이 발표되었을 때 헤밍웨이로부터 여성적인 글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떤 부분에서 그가 그런 감상을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피츠제럴드의 글은 (개인적으로) 대부분 미청년의 시선으로 쓰인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망가지다」에서 피츠제럴드가 보여준 심경은 특히나 그런 요소가 극에 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작가, 아버지, 남편으로서 살아가는 그의 위치를 떠나 그저 한 인간으로서 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에 느끼는 가장 진솔한 불안에 대한 고백 같기도 했다. 어찌 보면 헤밍웨이의 입장에서 나약하게 보였을 테다. (그렇지만 나는 헤밍웨이 역시 문체만 다를 뿐 같은 작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A였다. 몇달 전까지 나는 사람들에게 나의 ‘K’를 들키고 싶어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조각조각 내어 떠들곤 했다. 그와 주고받았던 유머, 함께 먹었던 음식, 그런 것에 대한 주제를 문득문득 사람들에게 던졌다. 이런 주제로 대화 나눠본 적 있어요? 하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내 마음이 식어버릴 때까지 웅얼웅얼거리면서 그를 내 마음속에서 계속 붙잡아두고 싶었다. 내 마음이 끝내 후련해질 때까지. 그렇게 꽤 오랜 시간 동안 겹겹이 마음에 쌓여 결국 나는 그를 내 소설로 끌어들였다. 그리고는 A가 되어 K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K는 단 한 번도 소설에 존재하는 인물로 등장하지 않았고, 그 작품은 퇴고할수록 점점 더 K라는 인물을 지워버리고 있다. 내 마음이 이젠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으므로, 그렇게 변해버렸다.
피츠제럴드의 소설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같은 주제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결이 있다. 하루키의 작품 역시 비슷한 결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두 사람 모두 ‘인간’과 ‘감정’ 그리고 ‘마음’을 주요 소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나는 이 두 작가의 만남이 매우 흥미로웠다. 다소 젊다고 생각했던 때에 안타깝게 죽어 버린 피츠제럴드가 만일 하루키만큼의 생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그리고 역시나 확신한다. 그는 아무래도 그의 성정이 녹아든 작품만을 썼을 것이라고 말이다.
* 본 서평은 출판사 <인플루엔셜>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