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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Dec 22. 2023

사랑하는 일, 살아가는 일

최인호,『겨울나그네』

학부 시절을 떠올려 보면, 늘 호수를 생각한다. 내가 졸업한 학교는 쓸데없이 건물과 건물 사이 간격이 넓고, 그 면적만큼의 폭을 차지하는 큰 호수가 있었다. 강의실 창가에 앉아 턱을 괸 채 호수를 바라보면 황량하고 건조한 풍경이 펼쳐졌다. 호수는 한 번도 마른 적이 없지만 나는 여전히 학교를 생각하면 마른 장작더미 같은 건조한 기운을 느낀다. 메마르고, 갈증이 나는, 아름답지 않고, 거칠게 성겨 있는 넝쿨의 모양새. 나의 학부시절이 온통 그랬다. 아무리 물속에 손을 담가 휘저어 보아도 잡히지 않지만 무엇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 당장은 투명해 보이지만 고여 있을 때 가장 어두운 상태. 그러니까 내게도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의외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스무 살에서 스물한 살로 넘어가던 겨울에 나는 어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무서움을 알았다. 그것을 깨달았을 땐 나를 견디고 이겨내기 위해선 나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루빨리 학교를 졸업하고 싶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돈을 벌어 내 인생을 스스로 설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나라는 사람이 온통 불안정한 물결이 이는 호수 같아서, 때이른 겨울을 불러와 꽝꽝 언 풍경을 만들어버리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했던 것도 같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학부시절 학점을 받고, 자격증을 취득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끊임없이 나의 존재를,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특히나 사랑 같은 건 내 인생에서 가장 나중의 일이었지. 30대의 초입에서 다시 20대의 끝자락으로 시간을 역행 당한 이후로 나는 요즘, 내게 ‘다시 20대의 시간이 주어진다면’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유쾌한 인간으로 사랑하는 일, 내게 닥친 시련과 운명에 곤두박질치지 않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 고민한다. 삶의 속도만큼이나 우리는 너무 많은 작별을 한다. 그러나 감정을 다루는 능력이 설익은 나는 본능적으로 자꾸만 그것을 유예하려 한다.  

   

최인호 작가의 『겨울나그네』는 이러한 인생의 허무, 청춘의 한가운데에서 ‘유예된 희망’을 돌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1984년은 잔잔한 호수 위로 격동의 물결이 일었던 시기다. 사회/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대, 이 작품은 한 인간의 생을 들여다보는 척하지만 실은 세상을 향한 참담함, 분노가 섞여 있는 작가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주요 인물인 ‘민우’와 ‘다혜’는 한국 사회에서 전형적인 세대에 속한 인물이다. 소설 초반에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의과생임에도 불구하고 잔뜩 고장 나 있는 민우와(남자들은 원래 호감가는 이성 앞에 이따위 등신짓을 하는 것이 진실인가 생각해보았다) 가족의 통제 아래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고 싶은 다혜의 가벼운 썸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다혜가 민우를 알아갈수록, 민우가 다혜를 알아갈수록 작가는 인간사의 곡절, 즉 필멸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한다.     


민우의 삶은 비춰지기엔 타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만큼 근사하나, 실제로 그가 어떤 마음으로 생을 견디고 살아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시작으로 작가는 그의 탄생 배경을 비틀어놓기 시작한다. 아름답고 성스럽게만 기억되었던 어머닌 사실 고아원에서 자라 척박한 환경에서 유일한 구원자일지도 모를 아버지를 만나 (어디까지나 그의 추측인데다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왜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부러 가정이 있는 남성을 유혹했을지도 모른다. 같은 고아원에서 자라 인공 혈육이라 불리우는 이모 역시 술집 마담이다. 그는 아버지가 지병으로 의식을 잃은 이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천애고아가 된 후에야 민우는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진정한 어른의 기로에 서 있을 때, 버팀목도 고임돌도 없이 중력을 이기지 못한 채 쓰러져 버린다. 남들과 다르게 세대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다정한 아버진 불륜으로 자신을 낳게된 것이며, 연이은 사업 실패로 채무자들이 의식 없는 아버지의 병실로 들이닥친다. 배다른 형제는 외국으로 도피해 버리고, 설상가상으로 분노의 걸음을 헛디딘 나머지 전과자가 되어버린다.    

 

전과자 된 이후 민우의 삶은 급속도로 기울어진다. 의과대학을 재학할 정도로 영리한 사람이었으나 어쩌면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데에는 빌어먹을 자존심이 큰 몫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한창 다혜와 썸을 타던 와중이었으나 전과자가 된 이후 그는 그녀의 앞에 나타나는 것을 꺼린다. 마찬가지로 절친한 친구인 현태 앞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그가 발붙일 곳은 인공 혈육이자 이모라 부르는 ‘로라’밖에 없다. 로라는 그녀 자신의 방식으로 민우를 지켜내려하지만 미군을 접대하는 술집의 지배인이 된 민우의 삶의 줄기를 원래대로 되돌릴 순 없다. 그는 그곳에서 마약을 밀매하고, ‘제니(은영)’의 성적 유혹에 굴복하고 만다. 심지어는 제니가 그와의 하룻밤을 빌미로 아이를 가졌다는 (거짓말이지만) 말에 자신과 같은 처지를 양산하고 싶지않아 그녀와 결혼을 하기까지 한다. 그는 늘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다혜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다.     


  한편 다혜는 그가 전과자가 된 후에도 면회를 가며 그를 기다린다. 다혜 역시 민우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의 속성이란 참으로 유한하고 얄궃어서, 그녀가 진실로 민우를 필요로 했을 때 그는 그녀의 곁에 없다. 대신 민우를 대신해 그녀를 보살피던 현태가 다혜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현태는 민우만큼의 능력을 지니진 않았지만 민우만큼의 추락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량처럼 보였던 그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취직을 하기까지 한다. 그 사이 민우는 다혜의 앞에 나타나지 않고, 소식은 영영 끊겨 버린다. 그때부터였던가. 현태는 ‘민우’라는 선으로 그어진 다혜와의 관계를 좁혀간다. 현태는 사랑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비굴하고 모난 모습을 다혜에게 서슴없이 보여준다. 다혜는 현태에게 서서히 마음을 연다.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현태 캐릭터가 더 좋았다) 실로 운명의 장난이다.        


  그러니까 『겨울나그네』는 아무리 노력해도 운명에 맞설 수 없는 인생의 고독을 다루는 이야기. 탁상공론처럼 ‘꿈’이고, ‘이상’이고를 논하기 전에 현실에 불어닥친 얼음장 같은 시련을 가장 밀도 있게 직시하는 작품이다. 이것은 방황하는 청춘에게 젊음이라는 희망이 있는데 왜 이겨낼 수 없느냐고 묻는 기성세대에게 던지는 저항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애를 쓰는 거야.’, ‘그 감정이 뭐라고 휘둘리는 건데’, ‘네가 품은 이상이 밥이라도 먹여줘?’하고 질책할 수 없다는 메시지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너무도 알 수 없어서, 함부로 타인의 선택과 삶을 비난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개인의 양심을 저버리거나 배반하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 이면엔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장을 넘기며, 처음엔 민우 캐릭터를 전형적인 남성상으로 우습게만 봤지만, 한편으로 내가 민우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전과자에 천애고아, 심지어는 출생의 비밀도 불투명한 환경으로 순수하고 맑기만 한 다혜를 아무런 가책 없이 만날 수 있을까?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역시나 쉽지 않지. 나 역시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있으니까. 남들에게는 사소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비밀이 내게는 크게 다가오는 결점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소한 면면들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중일 것이다. 홀로 애끓고, 고민하고, 분투하며.      


  최인호 작가는 슈베르트의 유작인 <겨울나그네>를 모티브로 이 작품을 설계하게 되었다고 한다. 슈베르트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통해 인간의 고독에 대해 표현했다. 고독하다는 것은 홀로 인생의 쓴맛을 견뎌낸다는 뜻이다. 쓴맛이란 뱉어내고 싶지만 삼켜야 하는 것. 구원 받을 겨를 없이 스스로 이겨내어야 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 없다. 민우의 경우가 그렇고, 다혜의 경우가 그러하며, 은영과 현태의 경우가 그렇다. 나 역시 나만이 가진 고독이 있다. 아무리 생각하고, 도망칠 구석을 찾아봐도 점점 밀려드는 파도처럼 마음을 옥죄는 일이 내게도 있다. 영영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지만 이겨낼 수 없다면 비겨내려고 해. 그것이 이 책을 읽은 후 내가 가진 고민에 대한 최선의 답이다.   



* 본 서평은 출판사 <열림원>과 함께합니다!


#최인호 #겨울나그네 #열림원 #뮤지컬원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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