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 『어쩌다 학교가 집이 되었다』
학교에서 밤을 새어 본 경험이 있다. 불이 꺼진 복도, 텅 빈 교실, 비어 있는 책상과 의자, 어스름이 새어 들어온 불빛과 어둠에 적응할수록 선명해지는 풍경과 실루엣. 당시 나는 교내에서 열린 <밤샘독서캠프>라는 행사에 참여했는데, 말 그대로 야자가 끝난 뒤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밤새 책을 읽는 활동이었다. 배정된 교실 두 곳을 제외한 모든 곳이 종료된 컴퓨터 화면처럼 캄캄하고 고요했다. 화장실을 다녀오다 호기심에 홀로 계단을 타고 내려가 아래층의 복도를 몰래 걸었다. 발소리도, 목소리도 죽어버린 복도와 창문 너머 생명력을 잃은 교실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종종 떠올리게 되는 풍경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왠지 지금의 상태에 오래 머무르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 학교의 규칙과 학생으로서의 정상성을 벗어난 것만 같은 불안함. 불안은 내게 곧 불편함을 안겨주었고 성장하는 내내 규정된 삶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전형적인 세대로 자라왔다. 그러니까 나는 쉽게 선을 넘지 못하는 사람. 일탈을 곧 불안과 불편으로 해석하는 어른이었다.
그 밤의 복도를 걸으며 건물 반대편으로 이어진 구름다리로 향했다. 구름다리를 넘어 다시 계단을 올라가면 캠프가 열려 있는 교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왔던 길을, 내가 아는 길을 되돌아갈 수 있었지만 어쩐지 나는 그날 내 뒤로 뻗어 있던 그림자의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보고 싶었다.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간 구름다리 앞에서 결국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만 한 자물쇠가 문의 입구를 단단하게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여기까지구나.’ 나는 휴대폰 불빛을 켜놓고는 투명한 문 너머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라보기만 하다 왔던 길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텅 빈 상태의 교정에 오래 머무르다 보면 고요하게 메아리치는 일상의 작은 소음들이 유난히 크고 두렵게 다가오기도 했다. 나는 종종 그때의 일을 떠올린다. 그때 나의 작은 일탈을 통제했던 것은 ‘나’였을까, ‘세상’이었을까?
김윤 작가의 『어쩌다 학교가 집이 되었다』는 이러한 ‘낙인이론’의 불편함을 정통으로 돌파하는 작품이다. 소설 속 주요 인물인 ‘나’는 현재 보호자가 없는 상태다. 연락되지 않는 아버지, 여섯 평 남짓한 방이지만 그마저도 물과 전기가 끊긴 보호처, 몰려온 채무자들로 인해 집은 벽지가 뜯겨 있고, 십 대 청소년인 ‘나’가 이러한 상황을 들키지 않고 보호 받을 수 있는 곳(shelter)은 오직 학교뿐이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혹자는 청소년 쉼터나 여러 기관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왜 도움을 구하지 않는 거지? 혹은 주변에 어른들은 뭐 하고 있는 거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소설의 중심 소재인 ‘선’에 있다. 팬데믹 이후 개인주의가 팽배해진 이 사회에서 겨우 십 대 청소년인 나는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스스로 자신에게 규정된 ‘선’을 지키는데 애쓰게 된다. 피해 주고 싶지 않고, 피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 어차피 진부한 결론만 따라오겠지 같은 생각들. 그러니까 비정형성의 세계에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때로는 더 나은 세계로의 활로를 차단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처럼 성인이 된 이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선’과 ‘기준’을 지키는 암묵적인 롤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나’의 대화 주체이자 객체가 되는 쪽은 애석하게도 나뿐이다. 선생님도, 친구도 있지만 ‘나’는 유일한 진실을 컴퓨터와 노트북에만 털어놓는다. 나는 전교 22등에,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명백한 목표가 있다. 그러나 꿈을 이루는 데 있어 도움받을 사람은 없다. 모아 둔 전재산 108만 원으로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생각은 입시원서를 쓰는 10만 원 상당의 금액을 지출하는데 망설임을 갖게 만든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선생은 학생들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선’을 그어버리고, 학생은 사회로부터 받을 수 있는 도움의 한계를 미리 구분 지어 버린다. 학교 곳곳에 붙어 있는 상담센터의 전단은 빛 좋은 개살구. 즉, 무용지물이다. 이 소설의 중심 소재인 ‘선’은 나의 심리적인 '선'이기도 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있던가. 나의 진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도움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오히려 나의 장래에 허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의 한계를 스스로 가늠하게 만든다. 이 역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미성숙함, 즉 청소년에게 그어져 있던 보이지 않는 '선'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이다.
한편 ‘나’와 반대의 환경에 있는 ‘신지혜’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녀는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그렇듯 진로를 정하는 데 있어 ‘적성’을 따지기 전에 ‘적합성’을 우선시하고, 입학사정관제 준비를 명목으로 진실로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대신 만들어진 이미지를 이용하려 한다. 이 역시 소통의 부재다. ‘신지혜’는 부모님과 입시 코디네이터가 만들어낸 ‘선’ 안에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학교에 머무는 '나'에게 일정량의 재화와 공간을 공급하는 대신 자신의 입시스토리를 만들어줄 것을 제안한다. ‘나’로 하여금 불량 청소년의 프레임을 씌운 뒤 전교회장인 ‘신지혜’가 그를 갱생시켜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꾸며내려는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양심의 ‘선’을 넘는 것에 대해 고민하지만 이내 자신의 생계에 보탬이 될 유일한 활로라는 생각에 지혜의 제안을 덥석 받아버린다. ‘나’는 스스로 ‘선’을 넘지 않겠다고 여러 번 다짐하지만 이 역시 나의 시선에서만 인정되는 이야기다.
요즘 나는 자기만의 트랙에 대해 생각한다. 트랙을 달리기 위해서는 그것이 트랙이라고 규정될 수 있는 선이 필요하다. 선이 없는 트랙은 트랙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의 '선'이라는 건 누가 만든 것인가 생각해보면 조금 혼란스럽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은 세상이 규정한 것도 있고, 내 스스로가 제한하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생각보다 영원성과 무한성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인간이어서 이것을 '시간'이라는 불변성의 가치를 핑계대며 어쩌면 세상이 아닌 스스로 가능성을 부정하고 제약을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 시작으로 우리는 자기만의 '선'을 넘어야 할 것이다.
* 본 서평은 출판사 <창비>와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