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본드, 『팬덤의 시대』
여행지에서의 마지막 날 밤이면 나는 그 도시로부터 청혼을 받는다. 관광지를 둘러보고, 그 고장의 유명한 음식을 나눠 먹음으로써 나는 그 도시를 점차 이해해나가기 시작한다. 분명 도시들은 각각의 매력이 있다. 서울과는 다르다. 같은 건물, 같은 언어, 분명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류와 교감의 형태가 같을진데 도시들은 이상하게도 다른 느낌이다. 소실점을 향해 뻗어 있는 거리의 감정들. 나는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이 좋다. 여행지에서는 늘 계획했던 것보다 시간이 남는 편이다. 예상보다 일찍 숙소에 돌아올 때면 나는 텅 빈 방에서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쉬워 다시금 산책을 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다. 주로 주변에 생겨난 독립 서점이나 소품샵을 둘러보는 걸 즐기는 편인데 그러다 마음에 담아둔 디자인의 반지가 있다면 꼭 마지막 날 구매해가는 편이다.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최근에 내게 생긴 취미다. 지금까지 나는 총 세 번의 청혼을 받은 듯하다. 제주에서 한 번, 부산에서 한 번, 그리고 광주에서 한 번이다. 반지는 따로 보관해 두는 여행용 지갑에 넣어두고 생각날 때마다 손에 끼워 보며 추억하기에 꽤 괜찮은 기념품이라고 생각한다. 이틀에서 삼일 정도의 시간. 그 정도면 사랑에 빠지기 충분하지 않은가? 어떤 입덕은 단 몇 초만으로도 성립된다.
여행을 많이 다녀보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여행을 다니려면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돈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 이십 대의 나는 여행을 삶에서 그렇게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여행을 떠나지 않더라도 세상을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내게 여행은 그저 껍데기가 화려한 패션 같았고, 기호 식품 같았다. 작년에 나는 제주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10년 만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 본 것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유튜브나 여행 에세이 서적을 뒤적거리며 ‘여행’에 목말라 있는 이들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했다. ‘여행’을 덕질하는 사람들. 시간과 돈이 많으니, 여유가 있으니 그런 거 아닐까 생각했다. 학부 시절만 해도 돈을 모아 여행을 떠나고, 또 돈을 모아 여행을 떠나는 동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나는 어릴 때부터 그럴 바엔 돈을 모아 적금을 드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었던 우물 안 개구리였다.
마이클 본드의 <팬덤의 시대>를 읽으며 나는 ‘소속감’에 대해 생각했다.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적으로 문화에 변화가 생겼다면 특히나 내가 속한 한국 사회에서는 점점 더 ‘개인주의’를 ‘효율성’으로 대체하여 명명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는 것 같다. 물론 혼자는 단순하고, 개인은 명료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커뮤니티를 형성하려는 본능과 욕구가 있는 듯하다. 코로나19로 대면 접촉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ZOOM’을 통해 커뮤니티를 형성해나가지 않았는가. 책을 읽으면서 유독 눈길이 머무는 구절이 있었다. ‘사회적 연결은 신체만이 아니라 정신에 바르는 연고’(p.47)라는 사실. 외향적인 성격 덕분에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고, 알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내게는 혼자서 스스로를 감당할 시간도 필요하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듬직한 이불 속에 폭 안긴 채로 어화둥둥 진짜 나를 어루만져줄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이를테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나 머리를 식힐 수 있는 가벼운 숏폼, 맛있는 음식을 주문해놓고 배달이 오기까지 생겨나는 기다림의 설레임. 그러고 나면 다시금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있는지를 (외향적인 성격 덕분에)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싶어진다. 지금 내가 무엇을 먹었고, 어떤 책을 읽었고, 무엇이 좋은지. 주체성을 지닌 개인이기를 원하나 결국 다시 사회인 것이다. 너무 친밀하지도, 배척되지도 않는 정도의 거리. 요즘은 ‘모카 휘낭시에’가 좋아서 어느 베이커리를 돌아보아야 하는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나는 ‘팬’이 됨으로써 동등한 위치에 있는 다른 팬들과 ‘준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준사회적 관계는 자본도, 시간도 셀프로 계산된다. 비인간적인 인간성을 공유하는 것이다. 마치 함께 책을 읽고 번개를 할 수 있는 ‘친구’를 돈을 주고 사게 되는 트레바리에서처럼 말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끼’(p.58)고 싶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나는 광주에 다녀왔다. 하고 많은 여행지 중에 광주를 선택한 것은 이방인으로서 그를 ‘습격’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입덕을 하게 된 이후로 나는 그 도시가 내게 말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이번엔 내가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조금 더 깊이 알고 싶었다. 내가 결코 알아내지 못할 면면들을 두루 살펴보고 싶었다. 이해해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광주 여행지를 소개하는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광주를 꽤 안다고 했던 주변 사람들에게 여행지나 맛집을 추천받았다 (의외로 ‘영미 오리탕’이던가? 오리가 유명하다는 평이 있었는데 먹지 못해 아쉽다) 그러니까 나는 ‘광주’라는 지명을 얼마간 덕질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실물을 영접했을 땐 성덕이 된 마음으로 마음껏 거리를 뛰어다녔다.
광주를 생각하면 나는 어쩐지 서글퍼진다. 내가 만일 땅의 신 ‘가이아’라면 손바닥으로 그 도시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진다. ‘광역시’ 답지 않게 조용한 도시.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비어 있는 도시, 굴러다니는 잡다한 쓰레기들. 반쯤 기울어진 채 피어 있는 개나리. 실은 광주를 여행하면서 그다지 내게 유희를 줄 수 있는 재미, 관광지로서의 매력을 느끼진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 도시가 좋았다. 그 도시만이 가진 도도한 표정이 예뻤다. 그 속에 감춰진 다정함과 정직함도 좋았다. 학부 때는 낯선 전라도 사투리를 들을 때마다 억세다고만 생각했는데, 광주를 이해하면서부터는 끝단이 늘어지는 장음마저도 귀엽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 잠깐 사이에 특유의 억양에 조금 적응된 내 자신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떠나는 날에는 숙소 근처의 소품샵에서 나뭇결이 생생한 반지를 구입했다. 나뭇결의 반지는 처음이다. 흔치 않은 결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덕력의 레벨을 올리기 위해 나는 이번에도 팬으로서 ‘굿즈’를 사 모은다. 그리고 깨달았다. 역시나 ‘습격’을 당한 쪽은 ‘광주’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습격은 아무나 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품격을 갈고 닦은 이들만이 다음의 습격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