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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Aug 02. 2024

신시어리 유어스

이민진, 『파친코』

  어릴 적 외할머니집에 가면 마당에는 거실만 한 크기의 커다란 정원이 있었고, 집의 한가운데에는 내 키보다 한참 큰 석류나무가 있었다. 할머니는 식물을 기르는 일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래서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야 하는 식물들은 집안으로 초대되었는데 나로서는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 선인장과 난초, 그리고 꽃이 있었지. 매년 명절이나 휴가 때 할머니집에 가면 어디서 왔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씨앗을 심어놓기도 했다. 다음 해에 오면 그것은 아름다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출처가 불분명한 이민자 같은 씨앗들. 모든 식물이 잘 자라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성인이 될 때까지 한국어를 잘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릴 적 엄마가 기억하는 할아버진 어눌한 발음으로 한국어의 동사와 조사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할아버진 외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에 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집안 곳곳엔 이국의 소품이나 향신료가 종종 발견되었고, 새해가 되면 쟁반처럼 크게 빚어놓은 동그랗고 커다란 모찌떡을 이웃과 삼촌, 엄마에게 나눠주었다. 나의 외할아버진 이삭처럼 목사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집안은 대대로 교회를 운영해왔다. 네모 모양으로 네 개의 건물이 있었던 할머니집의 가장 큰 공간이 바로 교회였다. 그곳으로 아픈 사람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찾아와 음식을 나눠 먹고 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괜찮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파친코』는 결국 ‘존재의 본질, 그리고 삶을 이해받는 소설’이다. 이삭과 선자의 관계는 한편으로 그들 부부가 일본에 이민자로서 살아가는 생태와 평행하는 플롯을 지니고 있다. 이삭의 삶엔 ‘출처가 불분명한’선자와 노아가 불현듯 찾아온다. 이것은 이삭에게 닥친 이민자와 같은 개념이며, 살아온 환경과 재료가 모두 다르나 이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이삭에게는 선택권이 있었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선자를 지나쳐갈 수 있었으나 그는 ‘신’을 매개로하여 그들을 자신의 ‘정서의 터전’에 데려다놓는다. 그러나 이것을 안착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마치 이들이 척박한 환경의 일본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일본으로 건너온 이후의 이야기는 단념의 키워드를 지니고 있다. 그곳에서는 말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해야하며, 자국민과 발음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쉽게 차별을 받는다. 희롱을 당하는 것은 일상이고, 학업과 취업에 모두 제약을 받는다. 사람들은 때로 ‘파친코’라는 공간을 우습게 생각하며 비판하지만 파친코에 모인 사람들 개인의 서사마저 비난할 순 없다.      


  나는 인물들 중 노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처음엔 모든 것이 ‘노아’의 선택으로 비롯된 결과라고 생각했다. 노아가 계속 대학생활을 했다면, ‘한수’의 직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면, 나는 그저 노아가 같잖은 허세에 굴복해버린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세상이란 생태계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역사는 대물림되고, 세상은 개인을 거시적인 프레임에 맞추고 있으므로 자아를 이해받을 순 없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파친코마저도 이민자들에겐 이민의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환경이 제 삶에 불쑥 들어와버린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조차도 쉽사리 나와 다른 환경을 타고난 이들을 특정한 프레임에 씌워 인간 존재의 본질보다는 그를 둘러싼 근육과 같은 배경에 자비로운 척 예외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그저 해석일 뿐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반성한 것은 그것이었다.     

 

  내가 보아왔던 가장 이상적인 가정은 나의 외갓집이다. 그들이 가진 특별함이 좋은 것이 아니라, 나는 그들에게서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을 배웠다. 할머닌 몇 번이고 할아버지를 떠나고 싶었다고 했다. 자식만을 생각하기도 벅찬 시절에 많은 사람들을 돌보아야 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할아버진 유순한 성정인데다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해 신혼초엔 소통이 되지 않아 골머리를 앓았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남편을 떠나지 않은 것은, 할아버지가 너무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이 좋아서 떠날 수 없었다는 건, 아무래도 그의 뿌리와 줄기와 잎사귀와 그 모든 혈류를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녀의 정원에 잘 모르는 식물을 들인 것처럼. 감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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