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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Jul 19. 2024

폐광과 가족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릴 때 가족과 자주 여행을 다녔다. 기억을 돌이켜 보면 방방곡곡 강원부터 제주까지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소나타에 4인 가족이 둘러앉아 통감자를 까먹고, 떡볶이를 찔러 먹었다. 오물오물 호두과자도 먹었다. 뽀글뽀글 탄산음료도 먹었다. 차 안에는 언제나 단내가 풍겼다. 휴게소에 들러 돈가스와 김밥, 라면 같은 음식을 먹고 난 뒤엔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들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갓길에 차를 댄 채 쉬기도 했다. 그러다 누군가 꺼억하고 트림을 하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뿡뿡. 몸 밖으로 먹고 난 찌꺼기들을 배출하기 바빴다. 다들 껄껄 웃으면서 장난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차 안에는 금세 역한 냄새가 풍겼다.


강원부터 제주까지.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은 우리 가족의 역사에도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여행지가 있다. 어느 유원지를 다녀오는 길이었던 것 같은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변이 흙길인 공터 한가운데 박물관이 하나 있었다. 암석 표면을 따라한 그 건물은 “석탄박물관”이었다. 어차피 정체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잠시 박물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박물관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석탄이 만들어진 역사와 종류 같은 것들을 보다 보니 빈 전시관이 조금 으슬으슬 춥다고 생각했다. 이만 내려가서 바로 아래층의 푸드카페에서 간식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그러다 “폐광체험”이라는 팻말과 함께 묘한 느낌을 주는 엘리베이터 한 대가 눈앞에 보였다. 그 엘리베이터는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문을 닫은 폐광을 둘러볼 수 있게 조성된 체험존이었다. 근처에 직원은 아무도 없었고, 우리 가족은 아무런 대책도 생각도 없이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겉으로만 보면 일반적인 엘리베이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문이 닫히는 순간 엘리베이터의 불이 꺼졌고, 붉고 어두운 조명 하나만이 서로의 실루엣을 구분할 수 있었다. 고오오오하는 굉음과 함께 아래로 빠르게 추락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엘리베이터의 전광판에 뜬 숫자는 빠른 속도로 지하층수를 기록하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금세 지하 10층을, 30층을, 90층을, 200층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웠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얼굴을 보자 두 사람 모두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게 누가 이걸 대책 없이 타자 그랬냐, 숨이 가빠지는 것 같다. 다 여보 때문이다. 엄마 우리 어떡해. 무서워. 여기 왜 오자고 그랬어? 우리는 끊을 수 없는 사슬처럼 엉켜 서로를 원망하기 바빴다. 그 사이 엘리베이터는 정말로 폐광까지 내려왔다. 아무런 보호장비를 착용하지 않았음에도 예상외로 견딜만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황량했다. 도구를 든 밀랍 인형 몇 더미만이 얼빠진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암석이었던 한 벽면이 문으로 변하더니 펑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사원증을 목에 건 직원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우리는 직원을 따라 문밖으로 빠져나왔다. 알고 보니 그것은 2층에서 1층으로 천천히 내려가던 엘리베이터, 체험존은 진짜 폐광이 아니라 세트장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지하 200층이 아닌 고작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며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소란을 피웠던 것이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머쓱한 얼굴로 푸드카페에 가서 음식을 나눠 먹었다. 식은땀은 금세 식어 솜털 끝에 말라붙었다. 그것은 그날 밤 몸을 씻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 가족은 매해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힘든 순간엔 타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을 택한다. 진짜는 혼자일 때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민이 해결될 때까지 혼자서 주구장창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글을 쓰고, 요리를 한다. 최근엔 여행을 다녀오는 선택지도 생겼다. 그러는 동안 톨스토이를 만났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할까? 톨스토이가 ‘사는가’에 의문을 품었다면 나는 미래형으로 되묻게 된다. ‘살아가야 할까.’라고. 최근에 나는 그것에 대해 오래 의문을 품고 고민하곤 했다. 우리는 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날마다 반복되는 삶을 사는 것은 지루하고,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어려워 화가 치밀기도 한다. 인생의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면 더 큰 산이 해일처럼 몰려오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면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밀어내야만 하는 순간도 생긴다. 회사에선 실적을 인정받기 위해 동료와 비인간적인 경쟁을 하고, 집에선 유일한 갬T이자 장녀로서 이성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것들을 두고 때로는 악역을 자처하기도 한다. 그 외의 삶에서 소설을 쓰고, 소설을 공부하는 일은 흥미롭지만 어딘지 모르게 억울하고 외로운 기분이 든다. 다시 묻고 싶어 진다. 이런 삶을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표제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결국 ‘인간성‘을 다룬 작품이다. 뻔하디 뻔한, 진부하기 그지없는 원초적인 플롯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우리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인간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탐구하게 되고, 고민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성이란 선과 악, 참과 거짓, 강인함과 나약함을 명료하게 분류하는 잣대를 세우는 일이 아니다. 인간을 그 자체로 다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드러나는 양상 중 하나는 무엇이든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또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지 깊게 이해하는 대신, 빠른 판단과 처신을 요구하기도 한다. SNS상에서 불거지는 논란과 그에 대한 대처. ‘손절’이라는 말 한마디로 요약되는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행태는 개인에게 적용되기도 한다. 때로 우리는 스스로를 가혹하게 대함으로써 목표에 ‘도달함’과 ‘도달하지 못함’을 구분 짓곤 한다. 학교에 합격했는가 하지 못했는가. 결혼을 했는가 하지 못했는가. 회사를 다니는가, 다니지 않는가. 사회성이 있는가, 없는가. 그 긴 시간 동안 성과를 냈는가 내지 못했는가. 이것은 비대면의 시대에 들어 더 얄팍해졌다. 세상이 데이터로 계산되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이 해결점을 데이터에 의지하여 구원받으려는 것만 같았다. 인간인 나조차도 사람을 함부로 데이터로 판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때로 데이터는 인생의 무기가 되었지만 그 무기는 되려 인간을 공격하게도 만드는 모양이다.


톨스토이의 작품뿐만이 아닌 대부분의 문학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서사에는 ‘인간성’이 담겨 있다. 절대적인 교훈이나 정보, 가치를 담은 것이 아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모두 문학작품이 된다. 어떤 작품은 작위적이지만 타당하고, 또 어떤 작품은 지극히 허구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것 같지만 생각보다 우리의 가까이에 실제 하는 사건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톨스토이의 작품세계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나 일부 종교적 색채가 깃들어 있지만 그는 그가 짜놓은 플롯 속에서 정답을 이끌어내기보단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한다. 그의 작품엔 선과 악의 기준보다는 ‘선택’과 ‘관조’만이 담겨 있다. 이는 내가 흥미롭게 읽었던 수록작 <악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이 재밌는 점은 그가 죽은 이후에 발표되었다는 점, 그리고 발견 당시 그의 작품책상 의자 등받이에서 숨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악마> 속 예브게니는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르고 이를 감춘 채 살아간다. 누구도 그의 과거에 대해 묻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과거가 들키게 될까 걱정하고, 자신이 쌓아왔던 업이 그로 인해 무너질까 두려워한다. 혹자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예브게니로 하여금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옳고 그름’만을 따지려 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모두 인정할 수 있지 않은가.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고, 누구나 하나쯤 들킬까 마음을 졸이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언젠가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세상에 정상적인 사람은 없으며, 누군가 자신이 ‘이상하지 않다’고 정의내리는 그 사람이야 말로 이상하다고. 그가 바라보는 ‘인간성’이란 무엇을 한데 정의내릴 수 없으며 역시나 바라보는 개인의 시선이 얼마나 조악한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사랑해’라고 말했던 한 친구는 늘 오늘만 사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친구가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불안감을 느꼈다. 알아온 시간에 비해 너무 쉽게 그 무거운 말을 들어 올린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와 함께 있을 때면 쉬이 어릴 적의 그 엘리베이터를 떠올리곤 했다. 나는 그 친구를 바라볼 때마다 내가 아는 데이터로 판단 내리려 했다. ‘그랬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전망을 예측했다. 내가 가물가물 현재를 경시한 채 미래를 바라보았다면 그 친구는 미래는 믿지 않고 세심한 눈으로 현재를 가만가만 만지곤 했다. 나 역시 그 친구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을 말하면 미래에 내가 그 말을 책임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미안함에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 친구를 믿지 못해서 그만두는 쪽을 선택했다. 시간이 조금 더 많이 흐른 후에 모든 ‘판단’의 기준 자체는 절대적일 수 없으며, 결국 내가 판단 내렸던 모든 것들은 그 친구를 향한 것이 아닌 나를 향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는 쉽게 사랑을 노래했던 것이 아니었다. 나보다 마음의 근력이 더 튼튼했기 때문에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스스로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미래를 생각하며, 끝이 나는 순간을 먼저 계산하며 끙끙거리듯 관계의 무게를 들어 올리려 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힘들 때마다 어려움을 함께 나누기보단 오래 혼자 참는 종류의 사람이다. 인내심의 강도보단 고통을 참는 능력이 꽤 발달한 편이다. 어떤 해결책도 내 스스로 답을 구하고 결정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를 아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나의 그런 점을 이용하려 들었고, 또 누군가는 부러 고통의 배분을 내게 더 나눠주려 했다. 또 누군가는 그저 해맑게 웃는 내 마음에 상처를 주지 못해 안달이 나 있기도 했다. 그 긴 시간 살아오는 동안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세월이 배어든 깊이가 있을진데 어찌하여 나를 함부로 단정하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마다 인류애를 상실해 간다는 인상도 받았다. 모두들 사회적인 가면을 쓰고 있으나 겉으로만 다정할 뿐, 인간성 자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언젠가, 인간으로 인해 상심했던 내게 ‘무엇이 고민인지 이야기를 좀 털어놓아보라’고 말하는 대신 이마를 맞댄 채 ‘어떻게 하면 네 마음이 한결 편해질 수 있을까’를 궁금해하던 그런 말 한마디에서 나는 오늘을 확신하고, 내일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것들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으면 무엇을 대단히 여겨야 하는 걸까? 이제 나는 알 것 같다. 여전히 생과 사의 경계에서 인간 본성의 이기심이 다시금 피어오르더라도, 그것조차도 인간성이라는 것을 알겠다. 우리가 함부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듯 사람은 평면적일 수 없으며, 다면적으로 구성된 사람의 한 면만 보고 그 사람의 전부를 함부로 정의내릴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인간은 누구에게나 사랑이 있다. 절대로 나와는 어울리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제 오늘을 소중히 여기며, 이것을 절대 잊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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