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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Jul 29. 2024

내게 기대는 사람

#18 그런 사람이 좋아요

최근에 자주 펼쳐봤던 시집은 주하림, 진은영, 신미나 시인의 작품으로, 깊은 밤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손톱으로 아무 장이나 푹 찔러 펼쳐지는 구간을 읽거나 필사를 했다. 막 샤워를 끝내고 습도가 가득한 방 안에서 선풍기를 틀어둔 채 얼린 우유를 파박 깨 먹으며 보냈던 시간들. 나른한 분위기 속 오르던 미열과 겨드랑이 사이에 맺히던 땀. 방 한가운데에 놓아둔 스피커 사이로 흘러나오던 경쾌한 시티팝과 보사노바. 펼쳐둔 노트. 바다색 형광펜과 볼펜. 노랫말을 외듯 흥얼거리며 소리 내어 읽어보는 시 속에 담긴 다채로운 빛깔의 단어들은 나의 여름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가끔 동생새끼가 찾아와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채 먹을 게 없냐며 두리번거리다 스윽 발을 뺴곤 하지만.. 그런 시간마저도 행복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서른이 되어 책임지는 것들이 많아지고, 원하는 것들을 손에 쥐려 할수록 마음에 걸리는 것 없는 하루, 평화로운 시간들이 새어나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당연한 것들이 노력해야 하는 것들로 변하는 것을 체감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가족이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지 않겠다는 생각,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던 시간에 무릎의 수명을 걱정해야 한다는 생각. 그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버거워지는 일들은 끊임없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숨만 쉬어도 끊임없이 갈증이 이는 성장욕, 정체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자꾸만 증명해 대는 인정욕,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지나쳐 상대의 매력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경쟁욕. 그런 것들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가 있었고 (어쩌면 현재진행형일지도 모르는) 지금은 ‘조금만 더’, ‘한 번만 더’를 외치기보단 ‘충분하다’를 마음먹으며 포기하는 자세를 배우고 있다. 언제나 얻는 만큼 잃는 것들이 있으니까. 하루에 모든 것을 내줄 것처럼 살아가는 태도가 늘 긍정적이거나 유쾌하게 평가받지는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요즘, 욕심을 버리고 조금 더 마음을 풍요롭게 다져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게 정말로 쉽지 않지만) 살아가며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기회를 쟁취하는 것보다 운명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줄 아는 용기를 내보이는 것 아닐까.


  20대의 나는 주로 절규하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듯한 고통을 내뱉는 시를 읽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조금 더 자극적이고 뜨겁고, 열정적일 것. 붉은 색채, 포효하는 사람들, 요동치고 갈라지는 땅. 그런 것들이 내게 생명력을 느끼게 해 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박연준 시인의 ’미쳐 죽게 해주세요‘(빈센트) 같은 구절. 그런데 요즘엔 잘 모르겠어. 느슨하고, 나른하고, 평화로운 것 또한 새로운 세계를 향한 항해라는 생각이 든다. 때로 어떤 글은 단조롭고 차분하나 그 어떤 표현보다도 단단하고 강력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하림 시인의 글을 읽는 동안 자주 그런 인상을 받았다. 시집 <여름 키코>에 수록된 작품 중엔 이런 구절이 있다.


‘영원에 대한 감정은 영원을 빚을 수 없고 영원에 대한 기대는 영원만을 향할 테니 그저 너를 지켜본 시간들, 기억에 간신히 남은 희미한 여행객 같아 생각 속에선 모든 것이 흔들렸어.’(물에 비친 그림자)


영원하다고,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지고 있는 요즘이다. 애초에 영원한 것은 영원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음의 그 자체가 영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쓸 때면 영원한 세계를 영원하지 않도록 맺으려 안간힘을 쓴다. 한 사람의 생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다음이 있는데, 나는 그 사람의 내일을 쓰지 않는다. 과거를 기워내고, 현재를 쓸 뿐이다. 나조차도 내가 만든 인물의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인물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므로 함부로 규정하게 된다. 살아오며 많은 사람들을 마주했다. 그동안 머릿속으로는 사람의 특징이나 성정을 함부로 재단하여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치 내 작품 속 캐릭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듯. ‘사람을 잘 본다는 것’. 애초에 사람을 잘 보고, 못 보고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내가 본 일면 만으로 그 사람의 전부를 다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본 그 사람의 모습은 나로 인해 투영된 태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다 보니 주변에 소개팅을 주선해 주는 일이 꽤 있었는데, 그때마다 사람의 성정과 성향을 알기 위해 ‘피하고 싶은 것 3가지’를 묻곤 했었다. 이상형을 만나는 건 어렵더라도, 싫은 걸 피할 수는 있을 테니까. 나 역시 사람을 볼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3가지를 먼저 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여름을 지나오며 잘 모르겠어, 하며 그저 냉장고에 머리를 박고 찰토마토를 쪼개어 먹기만 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깨닫는 것들로 나를 단단하게 구성하고 있던신념이 깨질 때마다 뼈대가 무너진 성채처럼 어쩔 줄을 모르겠다. 피하고 싶은 걸 잘 골라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싫은 것보다도 결정적으로 좋은 것 한 가지가 싫은 것들을 모두 상쇄시키는 것 아닐까. 사람의 단점이나 약점을 먼저 파악하려는 태도보다는 장점과 강점을 발견하는 것이 더 필요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 결국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내 자신을 태도와도 맞닿아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최근에 나는 어떤 사람이 좋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는데, 그때마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편이었고 피하고 싶은 것들만 따지던 나머지 무엇을 선호하는지, 어떤 점을 좋아하는지, 어느 때에 안정감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았다. 이것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나는 적어도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가장 가깝고도 낯선 사람이야 말로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어떤 사람들이 좋고, 어떤 것을 좋아하지? 초여름을 보내는 동안 이것에 대해 오래 골몰해 있었고 지금은 막연하게 언어로 뱉을 수 있다.


내게 기대는 사람.


나는 내게 기대는 사람이 좋다. 기대는 마음을 갖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거든.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건 그 사람을 향한 믿음이 단단하다는 뜻이니까. 영원에 대한 모든 사유가 영원하지 않더라도 ’믿음‘은 한 사람을 기약 없이 영원함의 감정 속에 담아둘 수 있는 게 아닐까. 이것 또한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내가 잘 모르는 일이더라도, 머리맡에 앉아 좋아하는 간식을 까먹으며 ’나 오늘 이런 일이 있었어…‘하고 무람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태도. 졸였던 마음을 내게서 풀어내려는 시도. 내가 책을 통해 그런 시간을 보냈다면, 나는 내게서 그런 시간을 보내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모든 인간에게 해당될지도 모르는 공감과 유대의 태도이자 감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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