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등대로에서 만난 사람
가끔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를 돌아보곤 한다.
햇볕이 좋은 날 산책을 할 때라거나 주말 저녁 한강을 무한히 달릴 때. 생각에 빠지면 빠질수록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와 실제의 내가 같은지에 대해 곰곰이 따져보곤 하는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다. 애초에 사람들에게 나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지시킬 수 있느냐 생각해 보면 그것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생각해 주는 나는 내가 아닌 걸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내가 아는 나와, 타인이 아는 나 역시 결국엔 나다. 다 나다.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할까? 내가 생각하는 나는 제법 이상적이고, 냉소적이며, 평정심이 있고, 거친 면이 있다. 나는 생각보다 연약하지 않고, 저질스러운 농담도 좋아하며 화를 낼 줄도 알고, 욕을 할 줄도 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면을 보여주지 않지. 누구나 그런 모습을 보기를 원하지 않을 테니까. 사람들 앞에서는 최대한 다정한 언어를 사용하려 하고, 자기 검열이 심한 편이라 함부로 농담에 웃지 않으며, 가족과 대화를 할 때와 달리 이모티콘도 없이 "oo"이 전부이나, 사람들에게는 늘 다정과 친절을 장착하고 있다. "넵, 그럼요. (하트) (하트) (하트)". 화가 날 때에는 조용히 글로써 되갚아주는데 요즘에는 썩 잘 모르겠다. 하찮고, 같잖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화'의 요인이 되어 집에 와 오사쯔(고구마맛 과자)를 한 봉지 먹고 나면 넘겨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게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다정해지려고 노력하지만 나도 미움의 감정을 오래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굳이 겪게 만들어서 나의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 사람에 대한 미움은 키우면 키울수록 혹부리 영감의 혹처럼 커져서 사라지지 않은 채 대롱대롱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으며 오랜 시간을 살결의 정령처럼 함께하게 된다. 괴롭느냐고 묻는다면 미움의 감정은 괴로움보다는 때로는 나에게 지속 가능한 길을 제시하기도 했으므로 나는 이것을 영 싫어하지도 않는 것 같다. 하필이면 끈기가 있는 데다 독하기까지 해서 내가 한 번 미워하기 시작한 것은 빈틈을 주지 않고 탈탈 털어 나의 세상에서, 아니 세계에서 추방시켜 버리기까지 한다.
나는 나의 20대를 끊임없이 질투하고, 미워하고, 내 스스로에게 그 미워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고 응원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 미움의 대상은 때로 내가 되기도 했는데, 나는 미워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미워하지 않는 순간 져버리는 게 되니까. 그러면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 같으니까. 지치지 말고 미워해. 더 미워해! 완벽하게 미워해! 내 속에선 그런 일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었다. 나는 내가 미워해야 하는 대상들을 끊임없이 미워했다. 그래서 남는 게 있어?라고 묻는다면, 적어도 내가 틀렸다는 걸 부단히 증명하려는 자존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나는 '용서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겨울 동안 우연한 기회로 씀 칭구(라고 불러도 될지..) 용서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나는 억울해서 어떻게 용서를 하겠느냐고 말을 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되어가니까. 그게 효율적이니까 표면적으로 용서하는 척하는 것일 뿐, 어떻게 사람이 잘못을 빌지도 않는 사람에게 진정한 용서가 되겠느냐고 바락바락 따지지는 못하고 조용히 목소리에 힘을 준 채 말했었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뒤의 나는 어쩌면, 어쩌면 잘못을 한 사람은 용서를 구할 생각조차 없는데 오로지 나를 위해 그를 용서해야만 할 것 같다는 것에 생각이 머무른다.
내 마음을 괴롭게 했던 사람들, 스스로의 안전만을 위해 양심을 버리는 것을 개의치 않던 사람들, 그리하여 약한 사람들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여긴 어른들. 내게 거짓말로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 그래놓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심하게 벌을 받지도 않고 하하호호 웃으며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받지만 나는 이제 그들을 조금씩 용서해 보기로 했다. 왜냐하면은, 나는 결국 똑같이 되갚아주지는 못하는 사람이니까. 오로지 마음속에 미움만을 품은 채 발톱에 멍이 들도록 그저 달릴 줄만 아는 사람이니까. 용서와 동시에 내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슬픔과 이제 안녕해 보기로 했다.
속초를 여행하는 동안 등대로를 걸었다. 등대의 끝까지 걸어가다 마주한 어른이 있었다. 하얀 등대 아래 난간에 소주 한 병을 앞에 둔 채 양반 다리를 하고 있던 아저씨. 그날 아저씨와 나는 나란히 앉아 한참이나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저씨가 타고 온 하얀색 자전거 손잡이가 모로 비틀어져 있었고, 파도는 자꾸만 방파제에 걸렸다 도망가길 반복했다. 한낮이 지나 더위가 한풀 꺾였으나 여전히 하늘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새들은 파도 사이에 부리를 집어넣은 채 첨벙거렸다. 나는 잠깐 아저씨를 흘깃 바라보았고, 아저씨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나였다.
"아가씨, 그냥 용서해. 그게 최선이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고, 아저씨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문득 아저씨가 내게 말했다. 그 말에 흠칫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뒷걸음질을 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걷다 보니 방파제를 뒤로 한채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제서야 갑자기 안도감이 밀려왔는데 다시 등대를 바라보다 자리에 주저앉은 채 잠깐 동안 엉엉 울었다. 그 순간 이전에는 읽었으나 이해하지 못했던 톨스토이의 세계관이 이해가 되었다. 내가 꿈꾸던 우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책을 열심히 읽는 것도 나를 멋지게 포장하는 것도 아닌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을 풀어내고, 용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관계에는 자격과 대가가 따른다고 생각했으나 '악'한 마음에도 '선'한 마음에도 더 이상 값을 매기지 않기로 했다.
여름에 다시 씀 친구(라고 불러도 되나요)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아마도 이제 나는 다른 대답을 하게 될 것 같다.
"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 말씀하셨던, 그 용서. 이제 해보려고요."
<사랑하던 시대에게> 연재 목표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다. 연재를 시작한 지는 반년이 지났다. 그와 동시에 연재 중인 '직장 내 괴롭힘' 콘텐츠가 종료가 되면, 나 역시 회사를 조금씩 용서해 보려 한다. 나를 미워했던 사람들도, 내게 상처를 주었던 지난 사람들도 모두 용서해보려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고, 사랑받으려고 무리하게 애쓰지 않으려 한다. 과하게 운동을 하고, 과하게 책을 읽고, 과하게 글을 쓰고. 그런 것들은 이번 생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데다 제법 옹졸한 캐릭터라 크게 노는 것의 반경을 벗어나지는 (아마도) 못하겠지만 시도해 보려 한다. 조금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싶어졌다. (뜬금이지만 그 넓은 세상에는 클럽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도 포함되어 있당 힛)
2주 뒤에는 전주로 여행을 다녀올 것이다. 한옥과 한옥 사이, 아마도 한옥의 오래된 나뭇기둥에 기대어 보이는 볕과 그림자를 모두 눈에 담을 것이다.
하반기에 만나는 사람들과는 모두 학교 친구들처럼 오래 보고 지혜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내게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