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행복은 가까이에 아주 사소한 것에 있을지도 몰라
여름 동안 열심히 돈을 쓴 것이 있다면 토마토와 우유다. 토마토는 방울토마토보다는 큰 토마토가 좋고, 큰 토마토 중에서는 완숙토마토보다 찰토마토가 좋다. 빛깔은 완숙토마토가 더 그럴듯할지 모르겠지만 맛은 역시나 찰토마토. 주말마다 한강 러닝을 마무리하고 들르는 곳이 집 앞 슈퍼마켓, 속이 꽉 찬 토마토를 3개에 3천원 단위로 판매하고 있다. 초록빛과 주홍빛이 영글은 찰토마토는 한 입 베어물 때마다 오이의 아삭함과 토마토 특유의 신맛이 입 안에 퍼져 운동을 마친 뒤 먹기 좋은 여름 간식이다. 운동을 하지 않더라도 저녁에 출출할 때에, 혹은 출근 전입이 심심할 때에 한 개씩 꺼내 잘라먹어도 절로 신이 나는 맛이다.
토마토는 사시사철 즐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겨울보다는 여름에 더 자주 손이 가게 되는데, 아무래도 수분 보충에도 좋고, 시원하게 먹어야 더 맛이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얼음 동동 미숫가루에 빠져 있을 때도 있었는데 토마토에 미숫가루를 슉슉 뿌려 먹는 맛도 좋다. 허니버터 시즈닝을 뿌려 먹어도 맛있는데, 실은 당근을 먹을 때 곁들여 먹으면 좋고, 토마토는 생토마토 그대로 즐기는 것이 좋았다. 아무튼 여름보다 겨울을 더 좋아하고, 여름의 더위를 쉬이 견디지 못하는 나로서는 토마토가 있어 여름을 잘 보내고 있다. 학창시절에 익은 청소년 문학 <완득이>에는 주인공 도완득이 가슴을 간질거리는 첫사랑을 경험하며 뽀뽀의 경험이 ‘토마토에 입을 맞춘 느낌’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 아무렴 사랑하는 조재에게 입을 맞추는 경험이 토마토에 입술을 부딪히는 경험이라면 나는 그냥 토마토가 좋아서 입을 맞추고 싶다. 토마토는 키스보다 좋다. 탱글탱글 아삭아삭 새콤달콤. 푹 익은 완숙토마토는 프라이팬에 끓여 페이스트로 만들어 먹기도 좋고, 계란물을 풀어 스크램블 에그를 해먹기도 좋다. 모짜렐라 치즈와 올리브유를 두르면 금세 그럴듯한 샐러드가 된다. 토마토에 후추를 뿌려 먹으면 술안주가 되기도 한다.
하루의 마무리, 운동을 마친 뒤라거나 아침에 나를 위해 정성스럽게 토마토를 손질하거나 요리하는 시간을 가지며 나는 토마토를 통해 나를 위로하기도 해다. 토마토를 계속 먹으려면 회사를 열심히 다녀야지. 오늘은 소설을 이마아안큼이나 썼으니 토마토를 한 개 정도 더 먹어도 되겠지. 때로는 그런 생각도 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토마토를 자리에서 세 개를 먹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사실이야! 사과, 자두, 청포도, 수박 등 어떤 음식도, 과일도 가리지 않고 곧잘 섭취하는 나라지만 토마토는 그중에 최애다.
한편, 여름 동안 집 안에 크고 작은 이슈가 있었다면 가장 큰 이슈는 에어컨이 고장 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평소 글 작업을 하는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평일은 보통 체육관에 있거나 스터디카페에 있으므로, 나는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집 안 공기가 더워 부채질을 하고 선풍기를 틀고 있음에도 그저 가족이 덥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보다 무감하게 지나갔지 에어컨이 고장 나 그걸 고치지 않고 하루며, 이틀이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을 거라는 걸 도무지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얘기다.
봄에서 여름으로 옮겨 오는 동안 나는 ‘근육’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는데, 출퇴근길마다 무슨 일인지 알고리즘을 타고 어깨빵빵 근육 언니들이 나오는 유튜브와 숏폼을 보며 나도 한 체육인으로서 ‘근육’에 대한 나름의 환상을 갖게 된 것이다. 한강을 달릴 때마다 잔근육이 울렁울렁하는 청년들을 마주하곤 했는데 예전에는 관심 없이 마이웨이만 하며 달렸다면 요즘에는 스리슬쩍 눈길을 주기도 한다. 생각은 ‘아, 멋있어!’로 멈춰야 하는데 열혈인간인 나는 기어코 ‘아, 저 근육 내 팔에도 붙이고 싶다’로 생각이 옮겨져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리하여 요즘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근육. 근육을 키우는 방법에 골몰해 있는 상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여름이 더워도 아이스크림을 선뜻 먹기가 어려웠다. 민소매 티셔츠를 입었을 때 누가 봐도 ‘나! 운동한다!’는 느낌을 줄만한 울룩불룩 근육이 갖고 싶었다.
그리하여 내가 포기한 것은 아이스크림. 대신에 여름 동안 매일 저지방 우유를 한 팩씩 얼려 먹었다. 전날에 냉동실에 넣어 둔 우유는 다음날 운동을 마친 뒤에 살얼음이 일도록 녹기를 기다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숟가락을 들어 쾅쾅 내리치듯 부숴 먹는다. 눈꽃송이 같은 빙수의 모양대로 우유의 결이 찢어지면 한 입에 털어놓고는 와앙. 시원한 맛이 금세 입안에 퍼진다. 저지방우유는 당류에 비해 단 맛은 없고, 얼려 먹으면 물을 얼려 먹은 것 같은 맛이 나지만, 어찌 됐건 여름의 시원함은 이 친구가 다한 듯하다. 말복이 다가오는 요즘, 에어컨을 고쳐 이제는 더 이상 우유가 필요하지 않지만 오랜 기간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은 나로서는 우유만큼 반가운 얼음 간식이 또 없었던 것이다.
토마토와 우유. 실은 봄에서 여름으로 오며 근육에 관심이 생겨 매일 같은 식단을 유지했다. 아침엔 보리차 한 잔, 점심엔 오트밀과 미역국, 그리고 참치캔 또는 닭가슴살. 저녁엔 오트밀과 프로틴쉐이크를 한 잔 마셨다. 우유는 자기 전에, 토마토는 주말이나 가끔 운동을 마친 뒤에 먹곤 했는데 다른 것은 하지 않고 오로지 운동과 독서, 그리고 일만 했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 내전근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 들고 어깨에는 전과 다른 모양이 잡혔다. 하루는 선생님이 몸의 변화가 느껴지느냐고 묻기에 날을 잡아 거울 앞에 서서 몸을 관찰하는데 가슴이며 등이며, 배 위쪽에 복근 두 덩이가 생겨 있기도 했다. 이런 몹쓸 몸뚱어리도 노력하면 뭔가 변화가 있구나, 감탄하는데 두바이 초콜릿이 유행을 한데다 8월 첫 주에는 이렇다 할 중요한 행사나 일정이 없어 음식을 마구마구 먹었더니 이제는 근육 위에 살이 붙었는지 몸이 버겁도록 커져버렸다. 아무렴, 어찌 됐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쉽지가 않아 이래저래 애를 쓰고 있다.
스물아홉이자 서른 하나. 그 기묘한 숫자의 봄은 화상에, 그리고 미래를 확신하는 꿈에 가득 차 있었던 듯하다. 그것은 여름을 맞이하여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내가 꿈꾸던 것 중 한 가지를 무람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언제나 계획한 대로, 뜻대로 흘러갔었지만 진정한 어른의 세계란 불확실한 미래와 변수를 담담하고 겸손하게 견뎌내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내가 토마토와 우유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작가 양반, 소주가 아니구먼‘하며 껄껄 웃는 어른들에게 무어라 항변하지 못하고 얼굴이 벌게진 과거를 보냈다면 이제는 당당하게 말하련다. 나는 여전히 토마토와 우유가 좋고, 해리포터나 대런 샌 같은 판타지 문학이 좋고, 한 밤에 고요히 거실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을 때 동생새끼가 찾아와 실뜨기를 요청하는 그런 사소하고 작은 순간들이 좋다. 그런 순간들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시간이란 영원하지 않아서 아쉽기도 전에 아쉬운 마음이 들어 버린다. 아무렴, 어찌 됐건. 그런 친구들을 또 만나면 되고 그런 관계를 또 만들면 되겠지. 나는 아직 토마토처럼 찰찰하니까!
찰 토마토를 더 맛있게 먹는 방법 하나를 여러분께 알려 주고 싶다. 엄마가 요리를 하겠다고 사다 둔 찰토마토를 한밤 중에 몰래 꺼내 손질해 먹는 토마토가 최고로 맛있고, 다음날 엄마가 ‘누가 이거 하나 꺼내 먹었니?’하며 부들부들 난감해하는 모습을 볼 때 전날 먹은 토마토가 얄궂게도 맛이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동생이 지가 먹겠다고 사다 둔 우유를 몰래 꿀꺽하는 것도. 그러나 동생새끼에게 함부로 장난을 쳤다간 배로 당하므로 조심하는 게 좋다. 아무렴, 여름엔 토마토와 우유다! 여러분은 여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지, 나는 당신들의 안부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