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정체기를 잘 보낼 수 있을까
11년 전 여름, 친구와 전주로 여행을 왔었다. 당시 기억나는 것은 여름 더위에 탈진해 게스트하우스에 누워 밤새 끙끙 앓았던 기억. 길거리야 바게트를 눈앞에 두고도 햇볕에 익은 시뻘건 얼굴 위로 물수건을 올려놓은 채 2층 침대에서 몽롱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친구가 빵을 냠냠하며 먹던 기억이 생생하다. 창밖으로는 경기전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그 친구와 또다시 8월에 전주로 여행을 왔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전주는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첫 여행은 대학교 MT였다. 최명희문학관과 교동아트센터 사이에 있던 숙소. 당시에는 알지 못했는데 그 밤에 먹고, 먹고, 또 먹느라 알지 못했던 무한한 세계의 러브라인과 꿈을 향한 야망이 숨겨져 있었다는 걸, 나는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야 이래저래 들어 알게 되었다. 두 번째는 2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부모님 허락을 받고 떠났던 여행. 결국 한복을 챙겨 입다 탈진해 버린 데다 2박 3일 동안 식비로만 40만원을 썼던(사람들이 자꾸 믿지 않는데 나는 스스로 통제할 뿐 실은 여자 둘이서 떡볶이 5인분을 해치울 만큼 엄청난 대식가다) 기억이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지금. 정확히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서울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 싶어 찾아오게 되었다.
많은 여행지를 두고 전주를 고른 이유는 편안해서. 몇 번 누빈 걸 생색내듯 내게 익숙한 동네가 되어버렸다. 익숙하다는 건 안정감을 준다는 말이기도 하지. 담장과 기와 사이,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돌아다니다 보면 때로는 세상과 술래잡기를 하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몇 번을 왔더니 더 이상 볼만한 구경거리가 없음에도 나는 또 전주를 찾아왔다. 이번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전주를 조금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 지역의 분위기, 성격, 사람들의 정서, 그런 사람들 속에서 만들어졌을 성정. 그 지역을 여행하는 일은 어쩌면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게는 사람을 이해하고, 내 스스로를 이해하고 보듬는 시간이 좀 필요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전주에 가야겠다고 여행 계획을 새울 때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이 자꾸만 꿈틀댔다. 첫 여행이 끝난 뒤 생에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님께 양말도 사드리고, 적금도 들었다. 두 번째로 전주에 방문했던 당시에는 겨울 동안 아르바이트 네 개를 하며 번 돈으로 마련한 자취방을 정리했다. 그 방에서 얼마나 많은 글을 썼는지 모른다. 가족에게 반항을 해보겠다며 호기롭게 나가서는 한 학기 동안 연극 동아리도 하고, 미팅과 소개팅도 하고, 밤새 술을 마시며 소설을 쓰기도 했다. 친구들은 내게 방이 왜 이렇게 깨끗하냐고 했지만 몇날며칠이고 방을 치우지 않은 채 신하균과 샤이니, 그리고 마블과 DC세계관에 허우적거리며 폐인처럼 지냈던 날도 있었다. 그 학기 동안 성적이 많이 떨어졌고, 부모님은 이왕 나간 거 더 해보라고 오히려 내게 반항(?)을 했지만 스스로 떨어진 성적에 충격을 받아 슬금슬금 집으로 기어들어갔더랬지.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어리석게도 나는 도망치고 싶어서,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어서 다시 전주에 왔다. 서른이 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더 이상 방랑하지 않을 줄 알았더니 그저 세상과의 대결에 새로운 라운드가 열렸을 뿐, 달라진 것은 없는 듯하다. 조별과제 잔혹사를 만들어냈던 학부에서 벗어나니 사회에서는 더욱 악독하고 별로인 사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고, 어떻게 발버둥 쳐도 악한 사람들은 끝내 악하게 잘 사는 세계를 보며 그저 보이지 않는 운명을 믿어보기로 했다. 내가 처벌하지 않더라도 운명이 모든 걸 결정짓겠지. 그리고 이전까지 내게 있었던 모든 속상한 일들을 잊어버리려 한다.
이번 여행이 끝난 뒤에 아마도 내게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마음을 조금 더 단단하게 호기롭게 먹을 수 있을까.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나를 조금 더 믿어도 될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어서. 나는 이곳 전주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고즈넉한 한옥, 기왓장 아래 잠들어 있는 친구와, 뙤약볕 아래 이글이글 타오르는 정원의 풍경을 보다 보니 잠시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다. 눈썹과 눈썹 사이로 졸음이 몰려온다. 꾸벅꾸벅 졸며 써 내려가는 다음날들의 예고편. 낮잠이라도 잘까. 지금 눈을 감아 버리면 어쩐지 해가 저물도록 꿈속에 빠져 있을 것만 같아. 달콤한 꿈에 취하게 되더라도 서둘러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야지. 그러고 보니 전주는 내게 자꾸만 예상치 못한 변수를 안겨 주는 것만 같다.
“글쎄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요즘 내가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이다. 글쎄다. 애매한 답변이긴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쓰기 좋은 리액션 같기도 하다. 대답하기 어려울 때, 혹은 잠시 도망가고 싶을 때 그 말 한 마디면 전부 해결되는 것 같아. 친구는 내게 “민주야, 너는 앞으로 더 잘 될 거야. 네 속도대로 나아가고 있는 거야.”라고 말해주었고, 내게 앞으로 좋은 일들만 있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역시나 인프피답구나.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낙천적인 모습으로 제 외피를 감싸고 있는 그 친구를 보며 잠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고, 지금은 많이 혼란스럽다. 내가 세상 사람들을 바라본 시각들, 그리고 어쩌면 오해였을지도 모르는 나만의 관념들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해. 나는 그것을 전주를 여행하는 동안 느꼈다.
전주를 여행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이른 아침, 한옥마을을 러닝하다 잠깐 들른 성당에서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기도를 한 것이다. 전주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한 사람, 그 친구가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 자려고 누웠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것 없는 하루를 보낼 수 있었으면. 슬픔이 피어오르려거든 나의 행운과 맞바꿔지기를. 작고 사소하지만 걸음마다 행복이 담기기를. 간절하게 빌었으니 아마도 이뤄지겠지. 어쩌면 지금 벌써 이뤄졌는지도 모르겠다. 곧 가을이 올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시작됨과 동시에 국경을 넘을 것이다. 이것이 하반기를 시작하며 내게 다가온 새로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전주에 나의 가장 연약한 영혼을 묻어두고 호기롭게 긴 여행을 떠나 보려 한다. 그 첫 시작은 퇴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