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방랑 말고 방탕이 최선이라
퇴사 이후 대체로 나는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예정되어 있던 일을 제외하고는 본연의 나로 돌아간 시간 동안 긴긴 시간을 이불 위에 누워 있었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눈썹과 눈썹 사이로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끊임없이 몰려왔다. 퇴사는 했지만 여전히 수면 시간은 동일했고, 무기력해짐을 견뎌내기 위해 최대한 현실로부터 멀찍이 떨어지려 노력했다. 퇴사 다음날부터 도서관에 출근했다. 오전 7시에 체육관이 문을 열면 1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씻고, 회사에 출근하듯 9시에 도서관에 도착한다. 오전엔 장편소설 퇴고를 하고, 11시 30분이 되면 프로틴 쉐이크와 오트밀을 먹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1시간 정도 산책을 한다. 오후엔 주로 메일을 보내거나 강의자료를 준비하거나, 새로 도전할 공모전이 없을지 알아본다.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도 한다. 오후 4시가 되면 늘 먹던 프로틴쉐이크와 오트밀을 먹고, 6시에 다시 체육관에 도착해 운동을 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짐을 정리하고, 정리하고, 정리하고.. 통제할 수 없는 무기력함이 찾아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져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이부자리에 대충 몸을 던져 넣고 눈을 감았다. 휴대폰도 보고 싶지 않고, 책도 읽고 싶지 않고, 동생도 괴롭히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가 된다. 몸에 힘이 쭉하고 빠지는 것이다.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런 상태에 꽤 오래 빠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애쓰지만 내 의지로 공기의 압력 같이 찾아오는 무기력함을 꺾을 순 없었다. 쉬는 것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시간은 얼마 없으니까, 지금은 내게 중요한 시기이니까. 머리로는 헤드헌터를 만나고, 만료된 자격증을 다시 취득하고, 잠깐 사이에 단기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트에서 진행하는 추석 맞이 행사 자리도 알아봤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7년이란 시간 동안 회사 생활을 하며 다양한 종류의 삶의 태도를 마주했으면서도 그런 것 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이다. 나란 사람은.
생각해 보면 나는 그렇게 악착같은 편은 아닌 것 같은데 손에 쥔 것을 놓는 것을 어려워했던 것 같다. 학부 시절 여행을 떠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면서도 통장에 적금만 부을 줄 알았지, 내 경험을 넓히려는 시도를 해보지 않았다. 여행뿐만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태도가 그랬다. 나는 나의 세계를 넓히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아까워했던 것이다.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일이란 내 것을 잃어야 하는 일이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생까지, 그리고 회사에 가서도 단 한 번도 조퇴나 지각, 결석을 해 본 적이 없다. 개근상과 빌어먹을 성실함은 언제나 나의 것이었다. 나와 친근한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면 대체로 놀란다. 생김새와 말투, 목소리로는 세상을 다 누비고 다닐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이렇게나 폐쇄적인 사람이었다니. 어떤 친구에겐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너 그래서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니?’
오사카로 여행을 떠나기 1년 전쯤. 독서모임에서 세 번째 책으로 정한아 작가의 <친밀한 이방인>을 읽었다. 그때 내가 제안한 활동은 ‘거짓말 게임’이었다. 한 달 동안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용인해주기로 했다. 심지어는 자신이 쓰는 독후감에도 말이다. 나는 독후감에 거짓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신춘문예예 등단한 작가인데다, 첫 해외여행으로 떠났던 오사카에서 원고 작업을 했으며, 귀국길에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데다 임신 소식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고. 그것은 거짓말이었지만 한편으로 나의 바람이기도 했다.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니 멤버들끼리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신춘문예에 등단이 된 이후로 내 삶이 크게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이미 문학계에 있는 선배들을 매체를 통해 접하며 체감하고 있었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등단 이후로 이렇다 할 활동을 크게 보여주지 못해 위축되어 있었던 데다 그런 와중에 회사라도 열심히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설 쓰는 일을 좋아했지만 실은 소설가가 되지 않더라도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남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가정을 갖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나이에 관계없이 그저 내가 원한 것이었으니까.
최근에 한 선배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이래저래 골치가 아파 잠시 미뤄뒀던 그걸 꺼내보게 되었는데, 선배는 내게 결혼을 하는 이유는 ‘삶에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말을 해주었다. 얼마 동안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데다 상반기까지의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기왕이면 첫째, 기왕이면 서울, 기왕이면.... 나와 비슷한 사람.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슷한 사람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미치고 환장할 것 같은 사람. 나의 작고 소중한 세계를 양심도 없이 뒤집어 버리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 안정감이라고 했던가. 나는 안정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나 같이 천방지축인 아이가 울어재끼는데 어찌하여 삶에 안정감이 생길 수 있을까. 나는 웃기고 재밌게 살고 싶다. 세상이 뒤집어질 정도로 자극적이게.
오사카에 다녀온 뒤에 짧은 업무를 마치고 다시 나는 출국을 택했다. 앞으로 손에 넣은 티켓이 세 장이나 더 있고, 티켓을 두 장 정도 더 구하려 수시로 항공사를 들락거린다. 지금으로선 되도록 한국에 있고 싶지 않다. 며칠 전엔 수업을 마치고 교수님과 점심을 먹으며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곽민주’로서의 삶이 너무 이르게 찾아온 것 같다고. 조금만 더 늦게 등단을 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너무 작은 나에게 책임져야 하는 것들이 큰 것 같다고. 마음 같아서는 퇴사 이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멀리 도망가 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고. 교수님은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여행 계획은 제대로 세웠느냐고 물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 안은 정리되지 않은 빨랫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며칠 동안 치우지 않은 과자 봉지와 부스러기가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반항을 해보겠다고 호기롭게 바꾼 머리카락은 구불구불한 채로 바닥 위를 기어 다녔다. 나답지 않은 상태의 시간들을 보내다 갑작스럽게 떠난 여행이었다.
교수님과 헤어지기 전, 나를 꼭 안아주었던 그 품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나는 내가 대단한 작가가 된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다 소리소문 없이 사람들 속에서 잊혀버릴 평범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것 한 가지는 알겠다. 지금 내게 닥친 모든 상황들이 세상이 뒤집어지는 순간이라고. 끝이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놔버리고 싶을 때 또 다른 시작이 찾아왔다고.
스물아홉. 남은 하반기 동안 나는 더 이상 안정감을 좇지 않기로 했다. 아마도 연말이 되기 전엔 다시 사람들이 알던 나로 돌아오겠지만, 오랜 시간 체득한 나다움을 잃지는 못하겠지만. 마침표를 찍는 것보단 변곡점을 만들어내는 게 나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서울을 미워하고, 자꾸만 한국을 떠나려 하는 나를 너무 미워하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 부럽다며 쟤는 뭐가 그렇게 잘났느냐고 수군거리지도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 내게는 지금 이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4시간 뒤면 출발. 가방 속에 담겨 있던 여권을 꺼내 본다. 언제나 방랑해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방랑보다 더, 방탕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