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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Aug 26. 2024

세상이 너무 벽돌 같아서 포기한 거야

#22 밀어낼 수 없다면 등을 돌려 기대면 그만이겠지

  어릴 때 좋아했던 영화는 <해리포터>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슈렉>과 <백설공주>. 내가 이런 영화를 좋아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이들의 상관관계가 무엇이냐고. 맥락도 조화도 없는 이 그루핑에 나는 잠깐 마법사와 몬스터, 초능력자와 영의 세계를 구분해볼까 하다 고개를 가로로 젓는다. 권선징악 구조. 악한 사람은 결국 처벌을 받고,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흘러간다는 이야기. 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이상적인 희망인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나의 순수함을 꽤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실제로 산타가 집으로 찾아온다고 믿을 정도였으니까.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능력이 더 컸던 것일지도 모르지마안 어찌 됐건 나는 어릴 때부터 또래에 비해 순진해서 부모님의 걱정을 한몸에 받았다. ‘우리가 너를 너무 어리석게 키웠나 보다.’ 어릴 때부터 귀에 피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다. 그래서인지 못된 애들로부터 쉬이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하고, 화를 내기보단 줄줄 눈물을 흘리는 편에 서 있던 코흘리개 출신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 버릇 못 고치고 여전히 앙갚음보다는 당하거나 무너지는 쪽을 택했다.     

 

  오히려 좋은 거 아니야? 착하다는 거잖아, 라고 묻는다면 나는 다시 한번 세차게 고개를 흔들 것이다. 자라오며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고, 사회생활을 하며 ‘나쁨’의 워딩으로는 차마 담을 수 없는 ‘악’의 저편을 경험하기도 했다. 누구나 자라오며 그런 것 하나쯤은 경험했을 거라는 것도 안다. 어른이 된다는 건 한편으로 그런 것들이 마음을 쿡쿡 찔러오더라도 무뎌질 수 있도록 단단하게 다져가는 과정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가끔은 저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바보 같이 당해주기만 해서 결국 이렇게 된 거야,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      


  그래서 나는 악한 사람들이 처벌을 받는 영화를 좋아했나 보다. 통쾌함을 느낄 수 있어서. 이러한 성정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는데, 생각보다 나는 피 튀기는 스릴러물이나 한국식 공포 서사를 좋아하는 데다 마블과 DC세계관에 푹 빠져 있는 덕후이기도 하다. DC에선 데드풀이 가장 좋고, 마블에선 헐크를 가장 좋아하는 편이다. 자신의 욕망에, 감정에 충실할 수 있는 사람. 성장할수록 본질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고 느끼는 요즘. 어쩌면 ‘나’ 스스로의 진짜 영혼은 발바닥 중앙에 몰래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진짜 나를 마주하려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이불 속에서 내 몸의 체취를 맡으며 한껏 웅크린 채 발바닥을 쓰다듬어 주어야 하지. 결국 그런 건 혼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라 외로운 일 같다.


  요즘 나는 세상이 벽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다는 게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다. 순리대로 흐른다고 하지만 이때의 순리가 ‘선’을 향하는지 ‘악’을 향하는지 가늠할 수 없으며, 때로는 여러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린 사람들이 더 속 편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그럴 때면 쉬이 좌절감에 휩싸이는데 아무리 손에 힘을 주어 밀어내고, 부수려 노력해도 꿈쩍하지 않는 벽돌 더미 앞에 서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때면 가끔은 비틀린 마음으로 나도 제멋대로 살아버릴까.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되어 버릴까 하는 못된 마음을 품게 되기도 하는데, 역시나 그것도 적성에 잘 맞아야 하나 보다.      


  전주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들은 시간 속에 묻혀버린 채로 흘러가겠지. 상처를 입은 사람은 곪은 채로 살아가고, 상처를 준 사람은 사과 없이 더 달콤한 과일을 찾아나서겠지. 일찌감치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더 좌절로 다가왔기 때문에 나는 나도 모르게 운명처럼 내가 돌아서 버리는 쪽을, 그러니까 ‘변화’하는 쪽을 선택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이제 더는 하지 않기로 했다. 희망이 어디에 있을까. 문제가 바로잡히는 순간이 오기는 할까. 더 이상 아이처럼 굴지 않을래. 그 편이 좋겠어.      


  벽돌을 실컷 밀어내려다 포기하고 등을 돌렸더니 웬걸, 나를 힘겹게 만들었던 그것들이 오히려 기댈 수 있는 쉼터가 되었다. 역시나 포기하는 것이 정답인가 싶어 씁쓸하면서도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변하지 않을 미래 앞에 결국 묻혀질 시간들을 더듬거리며 더 이상 고통받지 않으려 해. 이것이 처서를 보내며 내가 매듭지은 이야기. 스물아홉의 절반을 보내며 체념하기로 한 나의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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