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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치 Jan 23. 2019

어른이 되면

너란 존재는 나에게 안정


.


1.



중증발달장애를 가진 ‘혜정’ 그리고 그녀의 언니 ‘혜영’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장애인 수용소에서 쭉 자라온 혜정이 서른 살이 되던 날, 혜영은 그녀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 혜정과 사는 것은 마냥 쉬운 일이 아닌, 이전보다 더 어려운 생활이 되어버렸지만 함께 있음에 행복해한다. 그런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다큐멘터리는 우리의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2. 돌봄



혜영은 누군가의 삶을 돌본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혜정은 혜영의 존재 없이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혜영의 모든 계획, 행동은 혜정에게 맞춰야한다. 특히나 혜영이 여행을 가는 장면에서 더 깊이 느껴졌다. 혼자 가는 여행도 그냥 홀연히 떠날 수 없었다. 혜정을 돌볼 친구들, 그들이 함께 보낼 시간, 음식, 장소 이 모든 것이 갖춰야 했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평범한 일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혜영의 손길은 그녀에겐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누군가의 존재가 필수라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너가 없으면 안돼.” 라고 말해야하는 거니까. 우린 ‘너’가 없어도 괜찮아야한다. 혜정도 그렇게 외치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것 같아 더 안타까웠다.



나는 누군가를 돌볼 자신이 없다. 강아지를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책임지고 돌볼 자신이 없어 감히 키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주변에 ‘돌봄’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부모님이다. 한 자녀를 돌보는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도 참아야 하는 날들이 더 많다는 것을 내 눈으로 많이 보았다. 아직 어리고, 철도 없는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3. 안정



혜정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사는 혜영에게 친구들은 묻는다. 한번쯤 안정적인 삶을 살아보고 싶지 않냐고. 혜영은 망설임 없이 “나는 이 삶이 안정이야. 오히려 이 생활을 벗어나면 훨씬 불안정해질 것 같아.” 혜영을 본 10명 중 적어도 8명은 그 삶이 불안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안정적인 삶에 대해 정의 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남들이 넌 불안정해 라고 백번 외쳐도 내가 이 삶이 만족스럽고 안정적이라면, 그거면 된 것이다.



각 사람마다 안정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 결국 내가 만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단 것을 언젠가부터 잊고 있었던 것 같아서 이 말이 아주 오랫동안 곱씹게 된다. 그리고 또 곱씹게 되는 것은 혜영이 망설임 없이 “난 안정적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사실 부러웠다. 스스로 안정을 만드는 것도 서툰 나는 타인의 반응에 민감하기까지 해서 거의 불안정함을 달고 산다. 이제는 스스로 변화가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도대체. 내가 정의 할 수 있는 안정은 무엇일까.





4. 어른



“혜정이는 뭔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을 때면 어른이 되면 할 수 있어? 라고 내게 물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혜정이는 그 말을 들어왔을까. 나 또한 혜정이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나중에' 라고 말해왔지만 대체 그 나중이 언제쯤인지 생각해본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



어른이 되면 점점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일들이 많으니 하고 싶은 것을 훨씬 많이 할 수 있다. 대신, 그에 따른 책임감은 늘 따라온다. 책임감이 가벼운 경우는 잘 없다. 늘 무겁고 버겁다. 그래서 선뜻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아직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지만 혜영이 지은 노랫말처럼,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기도 간절해지기도 한다.





5. 혜정



사람들은 나를 불쌍하게 혹은 이상하게 혹은 귀찮다는 듯이 쳐다본다. 그런 시선을 오랫동안 받아온 나는 늘 죄인이 된 것 같아 사과하는 것이 익숙하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언니는 왜 자기를 쳐다보지 않냐며 서운해하지만, 언니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 시선이 자꾸 떠올라서이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나를 귀엽고 예쁘게 바라봐준다. 그렇게 신이 날 때면 숨이 찰 정도로 춤을 마구마구 추고 싶다! 친구들과 스티커 사진도 매일매일 찍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날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행동을 하고 싶은 평범한 사람이다.





6. 혜영



혜정이와 함께 살아가는 것은 온전한 내 삶을 포기해야했고, 앞으로 사회에 더 많은 소리를 외쳐야 한다. 아직까지 국가가 내미는 장애인들을 위한 손길이 따뜻하지 않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이 걸음을 걸어야만 한다. 혜정이와 나의 삶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소리치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차근차근 같이 걸어가다보면 우린 무사히 할머니가 되어있지 않을까. 이런 걸 느끼게 해준 혜정이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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