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일기
시절인연이 나에게 남긴 것들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은 끝이 없는 것 같다. 한때는 시절인연이라는 단어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리 사이에 어떤 다툼도, 오해도, 멀어질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 만으로 맞이하는 이별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한 시절이 끝나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때 왜 내 곁의 사람들은 계속 변하는지. 한때 모서리에 우리 오래오래 친하게 지내자고 적은 편지를 주고받던 친구들은 지금은 다 어디에 있는지. 특히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뒤로 더 심해졌던 것 같다. 제법 친하다고 생각했던 동료들은 퇴사 후에는 그저 잘 지냈던 동료로 멈춰버리는 게 내가 뭔가 부족해서. 내향형의 사람이라 적극적으로 인간관계를 관리하지 않아서. 그래서 내가 놓친 것이라 탓하기도 했다. 그때 친구의 친구가 인생은 지하철이란 얘기를 해줬다.
인생이 지하철이라면 앉아있던 누군가가 자리를 비켜줬기 때문에 더 고단하고 더 오래갈 사람들이 앉을 수 있었던 거야. 중간에 내려준 사람들 덕분에 또 새로운 사람들이 타는 거지. 그러니 모든 인연에 사사로이 마음을 쓰지 않고 매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돼.
그제야 시절인연이라는 단어가 마냥 나쁘게만 다가오지는 않게 되었다. 누군가 떠나간다면 그것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그 자리에 새로 앉을 또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며 의자를 따뜻하게 데우고 있자고. 그러면서 지나간 인연들에게 또 현재의 곁에 있는 인연들에게 붙이지 않을 편지를 쓰는 습관이 생겼다. 나의 메모장에는 당사자들은 모르는 수취인 불명의 편지가 많다. 발신인은 분명한데 붙여지지 않을 편지들.
붙이지 않을 편지를 쓰는 이유는 다짐과도 같다. 관계를 소유의 관점이 아닌 순간의 관점으로 보는 연습이라 할 수도 있다. 지금 나와 밥을 먹는 사람, 지금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지금 내가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사람, 지금 나의 기쁨에 눈물짓는 사람, 상대의 기쁨에 지금 내가 나의 기쁨처럼 눈물 지을 수 있는 사람.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좀 더 다정하고, 따뜻한 위로가 되고 싶어 편지를 쓴다. 편지를 쓰는 동안에는 ‘오글거린다’는 말도 잠깐은 내려둘 수 있고 말로 전하기엔 쑥스럽고 부끄러운 말도 막힘없이 쓸 수 있으니까.
이미 스쳐 지나간 인연에게 쓰는 편지는 추억을 추억으로 남겨두는 방법이라 하겠다. 함께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너무 슬프게만 바라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눈물이 날 것 같지만 끝내 웃으면서 안녕이라 인사하는 것처럼.
어쩌면 오늘 나와 함께 했던 친구가 내일이면 갑자기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잘 자, 내일 봐-라고 인사했던 친구와 다시 인사할 밤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냥 슬퍼진다. 함께 했던 빛나던 시간은 다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고 끝엔 낡고 빛바랜 나의 마음만 남아있을 것 같다. 편지는 그런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이다.
재작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의 말이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우린 너무 아름다워서 꼭 껴안고 살아가야 해’ 우리의 연결고리는 너무나도 약해서, 친구가 원래 없던 사람처럼 사라졌었다. 아쉬움 가득했지만 다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 그저 슬펐다. 작년 하루, 블로그 일기를 되돌아보다 그 친구가 남긴 댓글을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친구의 블로그를 들어가니 몇 개의 글이 있었다. 안부글이라도 남길까, 다시 이웃 추가를 해볼까, 친구가 남긴 댓글애 대댓글을 달아 안부를 남길까.. 몇 가지의 방법이 떠올랐지만 두려웠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친구의 사정도 있을 텐데 굳이 지난 시간을 다시 붙잡는 건 내 욕심이 아닐까. 그럼에도 그 친구와 나눴던 대화들이 너무 좋았기에 용기 내서 친구의 댓글에 대댓글을 달았다. 저예요, 이름. 하는 편지를 남겼다.
다음 날 댓글이 작성되었다는 블로그 알림이와 있었고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댓글을 클릭했다. 댓글에는 이름님, 저예요..로 시작하는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편지에는 그동안의 안부와, 흔적을 지우고 떠났던 이후의 이야기와 친구 역시 다시 나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다시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고 틈틈 응원과 격려의 말을 주고받는다. 매일 그 친구와 대화하지 않지만, 어쩌면 한 달에 한 번 대화할까 말까 하지만 그래도 그 친구가 어색하지 않다.
연락이 끊긴 뒤에 그 친구에게 전하지 못할 마음을 알면서도 쓴 편지를, 다시 연락이 닿았을 때 전했다. 이제라도 전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친구는 편지를 받고 우리 영화 같은 일을 겪었네요 라며 웃었다. 그날 내 일기장에는 “읽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쓴 편지가, 보낸 사람도 받는 사람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과 시간에 우연히 닿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라고 적었다.
부드럽고 강한 그 친구와 다시 연락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된 일은 내게 터닝 포인트 중 하나였다. 우연히 닿은 편지가 주는 힘을 알게 된 날이었다. 내가 다짐처럼 쓰는 수많은 편지들이 주파수를 타고 흘러 나간다면, 누군가의 마음을 대신한 수취인 불명의 편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지나간 인연들에게 보내는 안부는 모두 같은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니까. 그저 덜 아프고 많이 웃고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쩌면 나 역시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는 편지들.
그날 이후로 익명으로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쓰고 있다.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 통의 편지가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며, 그 과정에서 나 또한 위로받을 마음으로. 무명편지가 누군가의 마음을 녹이길, 그로 인해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녹이게 돌 수 있도록. 다정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다정하려 노력하며 편지한다.
<낡아진 마음은 쓸모도 없이 애틋하고>
여러 마음을 담아 눌러쓴 글이 몇 자 있다. 내겐 다짐과도 같은 글. 이 글이 포함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시절인연과 관계없지만, 이 부분은 시간이 흘러 맞이한 이별에 대하여 내가 나에게 보내는 위로였다. 나의 위로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