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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 Jan 10. 2024

망설임의 농도가 낮은 사람

단상 일기


정세랑 작가의 <지구에서 한아뿐>  등장인물 중에 ‘주영’을 가장 좋아한다. 주영은 좋아하는 가수인 아폴로를 따라 어떤 위험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우주행 티켓을 망설임도 없이 받는다. ‘아폴로가 날 불러줬는데, 망설일 리가. 난 확신 백 퍼센트가 나올지도 몰라‘ 라며 당당히 말한 주영은 떠나는 날까지도 여전히 망설임 농도가 5% 미만인 사람이었다. 즐겁게 읽은 소설이었고 수많은 문장이 마음을 쿵쿵거리게 했지만 가장 깊게 남은 말은 ‘망설임의 농도가 낮은 사람’이었다.


해가 갈수록 이해할 수 있는 슬픔과 두려움이 많아진다. 동시에 망설임의 농도도 짙어져 간다. 그러나 마음은 망설임의 농도가 짙은 곳에서 금세 시든다. <지구에서 한아뿐>을 읽고 나는 왜 주영이 그토록 멋있어 보였는지. 불확실한 미래보다 확실한 애정과 열정으로 망설이지 않는 사람. 여전히 앞으로의 일을 알 수 없어 걱정되지만, 나도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라면 주영처럼 꽤 망설임의 농도가 낮다고 자신한다.







2024년 1월 3일 핸드폰 메모장엔 이런 글을 적었다.


나는 마음이 향하는 방향으론 망설임 없이 걸어간다. 그러나 메모장에도 적었듯 마음이 자라나는 방향에는 늘 돌멩이가 많다. 제대로 된 신발 없이는 꾸준히 오래 걷기 힘든 길이다. 애석하게도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마음이 앞서 늘 대책 없이 준비되지 않은 맨발로 내딛는다. 돌멩이가 많은 길을 맨발로 걷다 보면 발바닥에 생채기가 난다. 맨발 걸음도 익숙해지다 보면 굳은살이 생겨 덜 아프지만 발 가운데 말랑한 살은 아픔에 취약하다. 발이 아프다는 것을 눈치챈 뒤로는 깨달은 아픔에 한걸음 더 걷기보단 멈춰 선다. 그렇다고 뒤돌아 가거나 마음의 방향으로 걷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 그저 멈춰있을 뿐이다.


돌아서고 싶지는 않지만 발은 아프고. 속상한 마음에 괜히 발가락만 꼼지락꼼지락.

여러 길 위엔 여러 개의 멈춰 서있는 과거의 내가 있다.


오늘의 나는 마음이 향하는 곳을 망설임 없이 걸어갔던 과거의 나에게로 연고와 밴드를 들고 달려간다.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돌아보면 한 손엔 연고를, 다른 손엔 밴드를 들고 있는 내가 있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 앞에 쪼그려 앉아 발가락 꼼지락 거리던 발을 마주 본다. 생채기가 난 곳에 연고를 바르고 꼼꼼하게 밴드도 붙여준다. 그러나 아프지 않고 걸어가기 위한 새 신발은 준비하지 않았다. 오늘의 나는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줄 의향은 있으나, 과거의 나는 굳이 신발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과거의 나도, 오늘의 나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마음이 자라나는 방향의 돌멩이는 기꺼이 감수해야만 하는 것임을. 연고와 밴드면 충분하다. 멈춰서 있던 나는 다시 힘차게 나아간다. 걷다 달리다 또다시 걷다, 잠시 멈춰 서고. 가끔 땅에 앉아 쉬며 발바닥을 구경하기도 한다. 굳은살이 더 늘어가고 단단해져 간다. 그러다 새로운 상처를 발견하면 주머니 속의 연고를 꺼낸다. 그 위에는 밴드도 살포시 붙여준다. 밴드에는 이름이 써져 있다.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나에게 응원과 위로를 보내는 이들의 이름이다.


마음이 있는 곳까지 묵묵히 걸어가는 멋진 어른이 되고 싶지만 나는 멋없는 어른이다. 가는 길엔 길이 너무 험한 거 아니냐며 툴툴거리기도 하고 오늘은 발이 너무 아프니 이만 걷겠다며 길에 벌러덩 누워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이 자라나는 방향으로 걷다 보면 마침내 마음에 와닿는 지점에 도달한다. 나는 마음이 여러 개라 마음의 방향으로 걷는 내가 무수히 많다. 어떤 길은 짧아서 하루 만에 도착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길은 한참 남아 여전히 걸어가는 중이다. 마음이 향하는 길을 걸어야만 보이는 게 있다. 밴드 위에 쓰여있는 다정한 이름들과 뒤돌아 힘들다 외치면 곧바로 달려올 오늘의 나도,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각자 다른 마음의 길을 걷는 동행자들도.


돌멩이로 생기는 상처가 뭐 별 거인가. 칼날이 놓인 길이 아닌 게 어딘가. 나는 오늘도 맨발로 열심히 걸어 나가고 있다.

원하는 것을 향해,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향해 주저 없이 맨발로 걸어 나가는 모든 <맨발의 청춘>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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