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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한 세 가지 질문

by 도라

*9월, 가을의 시작과 함께 다정한우주 글쓰기 공동체에 참여하면서 받은 첫 과제다. 브런치북을 발행하기에 앞서 글쓰기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질문에 애쓴 답을 적어본다.


1. 나는 글을 왜 쓰려하는가

질문을 먼저 타이핑하고 나니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글을 왜 쓰지 않으려 하는가’하는 질문이 먼저 따라오기 때문이다. 왜 쓰려하는지, 왜 쓰지 않으려 하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지만 바로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글을 쓰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사람의 두서없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 두려워서. 글을 쓰려하는 이유는 나를 찾고, 공유하고 싶기 때문에.

유심히 생각지 않으려 하지만, 누군가가 내 글을 열심히, 또 많이 읽었다고 한다면 막연히 두려울 것 같다. 글을 쓸 때의 나와 직접 대면했을 때의 나는 비슷할 것인가 다를 것인가, 나의 지나치게 작은 부분을 부풀려 썼거나 큰 부분을 축소하고 넘어가지는 않았나, 그래서 이런 부분을 읽는 이가 알아차려서 실제 인물과 글 간의 간극에 실망하는 일이 발생하진 않을까.. 하는 부분까지 상상을 해본다. 이제 글쓰기는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점이 바로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 전 어떤 외국 남자가 유튜브 클립에서 했던 말을 떠올린다.


“당신의 삶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트루먼쇼처럼 대중에게 생중계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시청자들은 당신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 같나요?”


그때 그 남자를 잡았어야지, 그때 퇴사를 과감하게 했어야지 등등 가까이서 알아차리기 어려운 점들은 오히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 좀 더 명확하게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스케일을 조금 줄이면 친구들과의 수다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친구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고민거리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될 때가 있다. 이야기를 꺼내기 전 일차 객관화를 거치게 되기 때문일 테다.


글을 쓰는 행위는 혼자라는 가장 작은 단위의 자기 객관화다. 반면에 본인이 지닌 여러 개의 자아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에 가장 광범위한 객관화이기도 하다. 글을 쓰다 보면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과 아닌 것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 기준점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수차례 자문하며,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게 된다. 억울한 것만 같았던 일도 나의 책임은 더 없었는지 생각해 보거나, 상대방의 상황을 한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당시에는 특별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꼈던 일도 글 속에서 되짚어보면 고 작은 특별함이 반짝하고 모습을 드러내 작은 행복을 선물해주기도 한다. 그렇게 글을 쓴다는 것은 내게는 대장장이가 쇠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수십 수백 차례 두들기는 것처럼 나 자신을 엎치락뒤치락 살펴보고 다듬어내는 행위다.

나를 다듬기 위해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무척 개인적인 일일수도 있고, 글이 공유될 순간을 염두에 두고 다듬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무척 공공연한 일일수도 있겠다. 그런 점이 글쓰기의 매력이고, 글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한 두려움을 잊게 한다.


2. 글쓰기를 방해하는 것들

요즘 해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가장 먼저 찾은 핑곗거리는 바로 이것이다. 생리. [딸에게 보내는 레시피]에서 공지영 작가는 엄마로서 딸에게 말한다. 괜히 화가 나고 모든 것이 싫어질 때, 생리가 가까워져 오진 않았는지 확인해 보라고. 마흔 정도가 되어 나의 지랄 맞음의 주기가 바로 생기주기와 일치함을 겨우 깨달았다. 피할 수 없는 핑곗거리를 하나 찾고 나니 마음이 얼마나 후련하던지. 그래서 일단 생리주기가 일치하는 시기에는 이 핑계를 댄다.

물론 생리주기도 아닌데 무언가 못해내고 있을 때가 있다. 자책으로 뒤덮여 더 이상 올라올 구멍이 아무 데도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고 들어가고만 싶은 그런 때. 최근에 그런 시기를 위한 나름의 훌륭한 해답을 찾았다. 시작은 고대 그리스인들로부터였다. 누군가 말했는데, 그리스인들은 실패에 대해 크게 낙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험을 잘 못 치렀다면 지혜의 신이 자신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에 실패했다면 사랑의 신이 자신을 돕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21세기 현대인으로서 그리스 신들을 탓할 수는 없어서 나는 우주를 탓하기로 했다. 오늘 내가 멋진 글을 쓰고 싶었는데, 누군가 만나서 아주 매력적인 스스로를 무척 어필하고 싶었는데, 글은 시간에 쫓겨 엉망진창으로 업로드해 버리고, 초면의 대상 앞에서 나는 아이라인도 한참 번진 채로 말을 잘 이어가지 못해 버렸다. 아무리 봐도 스스로 밖에 탓할 데가 없을 때 나는 태양계와 은하와 우주를 떠올린다. 오늘 예상치 못한 일로 너무나 바빴고, 일정을 세밀하게 살피지 못했고, 아이들이 너무 보챘고 등등의 일들은 우주적 스케일로 보면 아주 미세한 기운의 꿈틀거림일 뿐이라. 아이들의 잘못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난 원인의 탓도 아니고 단지 초면의 그 사람과의 나의 인연이, 오늘의 글과 나와의 인연의 그저 거기까지인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일을 한다. 나보다 바쁜 남편은 쪽잠만 자고 나가야 하는 날이 많고 시부모님도 친정부모님도 삼 남매 육아를 돌봐주지 못하신다. 게다가 나는 창업까지 하고 싶다! 글을 쓰지 못할 이유야 태산보다 많다. 부정적인 생각에 매몰되도록 이끄는 유혹은 강하고, 선택은 쉽다. 하지만 어쩌다 우주가 다정한 기운으로 나를 이끌어주면 그때 나는 글을 쓸 힘을 내어 시간을 내어 기필코 한 번은 쓰는 것이다. 운이 좋은 하루다.


3.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란

둘째를 낳고 산후우울증이 왔었다. 어느 날 남편과 차로 귀가하다 빨간불에 걸렸을 때, 나는 옆좌석에 갓난아이를 내버려 둔 채 차에서 뛰어내렸다. 낯선 동네에서 무작정 한참을 걷다 한 카페에 들어갔다. 핸드폰도 차에 두고 온 채였다. 무심히 카페 한편에 꽂힌 책 한 권을 꺼내서는 단숨에 다 읽었다. 무슨 책이었는지 제목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n번차 상담으로도 나아지지 않던 나의 우울증에 대한 답이 그곳에 다 적혀 있었다. 종교도 없는데 바로 앞에 있는 성당으로 가 스테인드글라스로 내려오는 빛을 한참 앉아서 지켜보다 해질 무렵에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차에서 뛰어내리기 전과 후의 나는 달라져 있었다.

좋은 글이란 그런 글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썼든, 어떤 도서 번호로 분류되었든, 타인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글. 균열을 내고 넓히고 미세하게 흔들리게 할 수 있는 그런 글. [사피엔스]는 인류를 바라보는 시각에 균열을 내고, 독립출판물의 지극히 사적인 기록은 비슷한 경험을 반추하는 독자의 마음에 균열을 낸다. 우리는 그 틈으로 각자의 세상을 넓혀가며 성장한다.

내가 기록해 가는 나의 글 역시 다만 누군가의 세상을 좁히거나 부수어 괴롭히거나 하는 글이 아니기를, 부디 읽는 이의 마음에 균열을 파동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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