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일 차
요새 내 직업에 집착하고 있어. 잃어버릴까 봐 겁이 나기 때문이야. 엄마가 이 직업을 많이 좋아한다는 뜻이기도 해.
처음에 돌고 돌아 방송국 PD가 됐을 때, 그것도 예능 PD가 됐을 때는 하기 싫어서 절망하기도 했었어. 그런데 한 해 두 해 갈수록, 감히, ‘천직이네?’라는 생각이 드는 내 직업이 됐더라. 고생스러움이 재밌게 느껴지니까 이보다 천직일 순 없겠지. 결혼 후에는 아빠랑 눈떠서 잘 때까지 일 얘기를 하니까 더 재밌어졌어. 남들은 구성을 어떻게 했는지, 촬영을 어떻게 했는지 뜯어보는 것도 버릇이 됐고. 엄마 아빠는 새 프로그램이 나오면 꼭 같이 앉아서 보면서 감탄도 하고, 흉도 보고, 정말 많은 얘길 하곤 해. 항상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축복받은 길이라 여기고 있었어. 그렇지만 이 직업의 맹점은 절대적인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거야.
그렇다 보니 50일 전 일어난 영시의 탄생은 모든 걸 불확실하게 하고 있어. 물론 한국의 여성이라면 20대부터 일과 가정의 양립을 고민하니까 뜻밖의 문제라곤 할 수 없지만, 이 정도 강도인 줄은 몰랐거든. 손을 벌리는 것도 쉽지가 않아. ‘일’을 선택한 대가로 감내해야 할 내 가족, 우리 영시에 대한 아쉬움도 얼마나 클지 벌써부터 걱정이야. 그렇게 상상으로 스트레스받으며 지내고 있는 요즘, 직업에 집착하게 돼. 회사에서 만드는 콘텐츠를 이렇게 열심히 본 적이 없어. 순식간에 짝사랑하는 처지가 된 기분이야.
우연히 튼 EBS 다큐에서도 요새 워킹맘은 일 7 : 아이 3 : 가사 1의 비율로 중요도를 생각한다고 나오더라. 나만 이런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아빠는 내가 생각하는 최악이 뭐냐고 물었어. 나는 퇴직이라고 답했고. 퇴직을 선택하기까지 그 사이에 이직, 휴직, 전직 등 너무나 다양한 옵션이 있지 않느냐고, 최악만 생각하면서 미리 스트레스받지 말자고 조언을 해주더라고. 맞는 말이야. 안간힘을 써서 좋아하는 일을 접는 최악의 선택은 피해 갈 수 있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