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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 Feb 28. 2020

4. 내 입으로 설명해야 하는 순간들

[20대 조기폐경 극복 에세이 4]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던 나는 일단 병원을 다니게 된 것과 수치가 좋지 않다는 말을 가감 없이했다.  

이 상황을 포장할 여력은 없었고 어차피 알게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예상했던 만큼 각자의 스타일로 반응했다.  

엄마는 자책했고, 아빠는 안타까워했다.

두 분은 종교의 힘을 빌려서 마음을 다스린 것 같다.


나도 뭔가 마음에 타격이 있었는데, 더 짜증이 났던 건 엄마의 자책이었다.


그래서 그냥 버럭 화를 냈다.




“왜??? 그냥 나한테 일어난 일이고, 내 몸이 스트레스를 받던지, 내 호르몬이 일하기 싫던지 , 아무튼 나한테 일어난 일이잖아! 그걸 왜 엄마가 자책해? 나 당장 죽어? 그런 거 아니잖아! 애 못 낳는 거? 나 원래 애 낳을 생각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말을 쏟아내고 나니 비로소 미안한 마음이 좀 들었다.

엄마의 자책은 어떻게든 엄마의 방식으로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걸 지도 모르는데, 너무 내 생각만 한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게 사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다가, 갑자기 내 상황이 원치 않는 쪽으로 특별해졌다.

가족들도 나도 시간이 필요했다. 상황을 인지하는 게 전부는 아니니까, 어쨌든 삶은 계속 살아갈 테니까 , 크게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당장 죽는 건 아니니까, 내 성별이 바뀌는 것도 아니니까, 결국은 차분하게 받아들여지는 때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당장 조기폐경이 되었다고 해서 ,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일상은 다시 시작되고 나는 감당을 해야 했고 , 가끔씩 생각이 나고 또 잊어지기도 했다.


대학병원 정기검진도 1년에 한 번만 받는다. 아직은 호르몬제 치료를 병행하고 있지 않고,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생리(정혈)를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아 맞다. 나 조기폐경이었지’ 하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Photo by ÉMILE SÉGUIN �� on Unsplash


환경공해 연구소에서 진행되는 설문에 우연히 패널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생활습관과 다이옥신 농도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케이스였다. 채혈을 하고 얼마간 시간이 지났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계속 왔다.  보이스피싱인 줄 알고 계속 안 받았더니 문자가 왔다. 그때 검사했던 기관이니, 전화 좀 받으라는 것이었다.


“아… 저희가 아직 연구결과가 나온 건 아니고요, 개인 채혈해서 이상 있으신 분들은 개별 연락을 드리는데, 혹시 여성호르몬 수치가…. 좀….”


“네, 알고 있습니다. 수치가 높은 건 알고 있어요. 조기폐경인 것도 알고 있고요”


그 대답을 담담하게 하고 나니 마치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와 비슷한 먹먹함이 있었다. FSH 수치가 17.6~92.6 mIU/mL이면 조기폐경인데, 검진 기관에서 보내온 내 수치를 보니 초기 검사 때보다도 악화되었구나 싶었다.


이런 식으로 몇 번씩 내가 조기폐경임을 인식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정기 건강검진, 위와 같은 비정기 건강검진, 보험 가입 시, 의료상담 시 ’ 등.


내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던 모든 순간에 상대방에게 하는 이해를 시켜야 하는 그런 상황들이 있었다.

1년에 한 번 하는 종합 건강검진 후 의사에게 문진을 받는데, 내 몸이 가지고 있는 이상을 설명하는데 참 그 표정이 잊히지가 않는다.


“아니 이렇게 나이가 젊은데, 왜 벌써? 항암치료라도 받았어요?”


그가 무례하다는 생각보다 나 스스로 상처를 먼저 받아버려서 억울했다.


조기폐경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항암치료처럼 원인이 분명한 것도 있고, 나처럼 유전적 요인도 아니면서 뭐라고 이유를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사실은 구구절절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팩트는 내가 조기폐경이라는 것과 그것을 감안해서 내 검진 결과나 봐달라는 건데, 참 온갖 언어적, 비언어적 요소로 활용해서 멋대로 동정하기도 하고 난감해하기도 한다.

이럴 때마다 내 기분은 좋을 리가 없다.


공무(?)상 이 얘기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만약,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 미혼인 상황이라면 이런 상황을 전달하는 게 더 껄끄럽고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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