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영사전을 필사하고 소리 내어 읽고, 동시에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토플 학원에 다녔다. 할 일의 가짓수가 많았고 모든 것을 공평하게 대충 하는 나날이었다. 그래도 부모님이 아는 선에서 나는 큰돈 들이지 않고도 영어를 잘하는 수준이 된 아이였다. 그렇다면 외국어고등학교에 가야겠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외고 입학시험을 보러 가게 됐다.
나와 나이도 같고 생일도 가까운 친척 아이가 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그 애와 알게 모르게 경쟁 구도가 있었을 것이다. 억지로 하는 영어 테이프 듣기나 영영사전 필사를 어찌 되었든 시키는 대로 해낸 나를 통한 다행스러움과 약간의 우월감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학원이나 과외에 대해 정보를 먼저 알아내고 적절한 사교육을 받는 그 애를 보고 초조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나도 그 학원에 다니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와 같은 맥락인지 몰라도, 그 애와 나는 같은 날 같은 외고에 시험을 보러 갔다.
외고 시험이란 게 도대체 어떤 형식의 문제가 나오는 건지도 몰랐다. 그냥 아빠를 따라 지하철을 갈아타고 언덕길을 걸어서, 또 5층까지 계단을 올라서 고사장에 들어갔다. 교문 앞에서 친절하게 따뜻한 차를 건네는 '선배님'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는 2교시인가 3교시 정도로 구성된 긴 시험이었다. 무언가를 영어로 듣고, 또 무언가를 영어로 썼다. 정신없이 따라만 가면서 이미 '해내지 못했다'라고 생각했고, 합격할 가망은 없겠다고도 생각했다. 어른들이 원하니까 '외고에 가야 하는구나'라고 생각은 했지만 집 바로 근처의 공립 고등학교에 가게 될 거라고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그냥 그 시간은 지루한 가운데 무언가 이미 실패했음을 직감하는 시간이었다.
시험 중 쉬는 시간의 일이다. 다른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서로 아는 애들끼리 같이 온 경우가 많은 모양이었다. 친척도 외고 입시 학원을 다니면서 시험 직전 며칠간은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고 시험 준비를 했다고 들었었다. 그래서인지 큰 소리로 웃으면서 떠드는 남자애들 무리가 곱게 보이진 않았다. 같은 학원에서 온 애들처럼 보여서.
"아, 나 seagull이라고 썼어."
"씨걸ㅋㅋㅋ"
"갈매기 아빠ㅋㅋㅋㅋ"
기러기 아빠? 그 말조차 나는 익숙하게 꺼내서 쓰지 못했다. 우리 가족과 아주 좁은 범위의 주변 가족 외의 다른 형태는 전혀 몰랐던 어린 시절이었다. 이미 잊어버린 내 답안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망했구나. 뭘 제대로 썼어야 말이지. 그렇다고 공부를 덜 한 걸 스스로 탓한 건 아니었다. 그냥 짜증이 났고, 그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돌아와서는 학교 도서관에 들러 판타지소설을 빌렸다. 언제나 있던 방과 후 루틴이었는데, 그날은 유독 부적절감이 들었다. 뭔가 한심한 짓을 하고 있는 느낌이.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이었다. 친척도 불합격했다. 하지만 같은 학교의 그다음 전형 시험이 있었을 때 나는 응시하지 않겠다고 했다. 신포도였다. 무력감도 조금 있었을 것이다. 대신 친척은 그 시험을 통해서 그 학교에 합격했다.
그 학교의 합격 발표가 난 줄도 몰랐던 그날, 나는 학교가 일찍 끝나서 조금 여유로운 마음으로 친구와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평소 학교가 끝나는 시간 정도까지, 학교 안에서 우리 교실과 친구네 반 교실, 도서관 정도를 오가다가 집에 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집에 와서 엄마에게 혼이 났다.
"너는 학교가 몇 시에 끝났는데 이제 들어와?"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다는 말도 아니고, 그때 느끼기에도 정말 '일찍 들어와서 공부 안 하고 뭐 했냐'는 꾸지람이었다. 그렇게 직접적인 내용으로 혼난 건 처음이거나 정말 오랜만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혼난 게 아니라 일방적인 짜증을 들은 것일 수도 있겠다. "OO오빠 외고 붙었대"라고 동생에게 전해 듣고, 아, 그래서 엄마가 화가 났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거기서 납득이 된 건 아니라서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잘못도 없는 것 같은데 혼난 게 억울해서, 그리고 나만 외고에 못 갔다는 게 자존심 상하기도 해서.
겨울방학 동안에는 사정이 있어서 친척집에서 잠시 지내야 했다. 그동안 친척은 합격한 외고 교복을 입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입학하기도 전에 여러 행사가 있다고 바쁘게 나가기도 했다. 나는 집안에서 영어 공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