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SF. '바이 바이 메모리얼' Code 1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케이블카 방향으로 내려간다. 창혁은 따라오지 않는다. 한정판 비틀즈 씨디는 앞으로 다시 구하기 힘들 것이다. 모든 지나간 사랑들처럼. 어제들처럼.
이번에는 좀 다른 꿈이었다. 매번 등장하는 남자의 이름은 항상 기억나지 않았다. 비틀즈 씨디를 못 구한 후유증이 꿈으로 구현된 것 같았다. 나도 참 단순한 인간이었다.
오늘은 재택근무 마지막 날이었다. 주 4일 근무 중 3일은 재택, 하루는 사무실 근무였다. 사무실 근무는 3일간의 재택근무에서 생각한 아이디어나 회의 안건 등을 토의하고 같이 뒤풀이를 하는 그런 용도였다. 5층짜리 회사 건물도 1층의 회의실동을 빼고는 모두 직원들을 위한 편의시설, 운동시설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주로 2층에 있는 수영장과 3층에 있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주말을 나곤 했다. 내일은 XP-10의 홍보에 대한 아이디어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나는 XP-10T에 대한 사용평가와 그에 따른 개선점, 홍보방안 등을 대략적으로 발표해야 했다. 그런데 아직 샘플을 가동도 못해보고 있으니. 후우. 괜한 한숨.
다시 아메리카 시티로 향했다. 뒷좌석의 XP-10T도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내 생각뿐일 수도 있지만. 아시모프 박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 문은 열려 있고 박사는 없었다. 그는 전혀 자기 노하우를 지키려는 노력을 않는 걸까. 안 그래도 타 기업에서 리버스엔지니어링을 통해 클리어봇과 유사한 청소로봇을 개발하기도 했었다. 지금이 OEM 방식의 시대이기 망정이지 대량생산시대였으면 우리 기업은 이렇게 오래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아시모프 박사를 긍정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가 죠셉 슘페터보다는 피카소 쪽의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XP-10T로까지 오면서 사실 아시모프가 이룬 기술의 진보는 별로 없다. (혁신이라는 표현을 굳이 쓸 필요도 없다.) 단지 그는 해를 더해갈수록 다양해지는 로봇 디자인 패턴으로 주문자들을 만족시켜주는 것이었다. 그가 변태적인 건 역시 예술가형의 인간인 까닭일까. 모르겠다.
집 안으로 향했다. 음침한 공기는 여전했다. 지하로 내려갔다. 언제 봐도 청소로봇보다는 프랑켄슈타인 28호 따위가 만들어질 것 같은 곳이었다. 벽면 쪽으로 웬일인지 XP시리즈가 차례로 진열되어 있었다. 사무실 보급형으로 개발되다 수요가 적어 중단된 ME-0도 보였다. 그리고 벽면을 자세히 보니 희미하게 글씨 같은 게 보였다.
‘스잔나 사랑해.’
변태 영감 같으니. 이제는 드디어 로봇으로 넘어간 것인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시모프 박사.
“오, 이런 웬일이세요? 드디어 저랑 밤을 보낼 맘이 생겼나요?”
여전히 저질 농을 치고 있지만 뭔가 다급해 보였다.
“바쁘세요?”
“아. 네 좀 빨리 일이 있어서요. 아주 중요한. 일이 아주.”
아시모프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무언가를 분주하게 찾았다.
“저, 저기. 이번 XP-10T가 작동이 안되는데요. 키워드가 바뀐 건가요?”
“아, 여기 찾았다! 여기 있었군요. 그리운 사람.”
아시모프는 먼지가 들러붙은 사진을 들고서는 히죽히죽 웃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고는, 다시 방긋방긋 웃었다. 역시 변태다. 그나저나.
“저 박사님. 제 말 들으셨어요? 안 움직인다고요 로봇이!”
나는 소리를 질렀다. 아시모프는 그제야 좀 정신이 들었는지 내 쪽을 돌아봤다. 허나 사진을 흰 가운 안 주머니로 넣더니 당당히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서 있었다.
“저... 저기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왜 안 움직이는지. 간단한 AI를 넣은 것 말고는 전 모델과 다를게 없거든요.”
“AI요? 인공지능?!”
“한번 저처럼 해봐요 그럼. 꼭 끌어안고 ‘사랑해요 스잔나’ 라고.”
“제가 당신인 줄 아세요?”
아시모프는 담배연기 같이 미소 지었다.
“저는 이만 바빠서. 굿바이 클레어. 아니 하정 씨.”
하정? 그랬지. 지구 붕괴 전의 내 이름이었다. 지구가 붕괴된 이후 화성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끔찍한 과거를 잊기 위해 모두 이름을 고친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 로봇을 움직여야 하는데. 아시모프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나는 옛 이름이 주는 야릇한 무게감을 느끼며 힘겹게 지하실을 빠져나와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도 내내 ‘하정’이라는 이름이 낯섦과 친숙 사이를 오가며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에게 화성 이전의 기억은 결코 없었다.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