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들

하드보일드 크리스마스 6(완)

by 장명진

나는 옛 이름이 주는 야릇한 무게감을 느끼며 힘겹게 지하실을 빠져나와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도 내내 ‘하정’이라는 이름이 낯설고 친숙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에게 화성 이전의 기억은 결코 없었다. 없었다.


지난날, 나의 모든 괴로움은 사라진 것 같았지요.

그러나 지금 그 괴로움 다시 오는 것 같아요.

오, 난 지난날을 믿어요.

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

Now it looks as though they're here to stay.

oh, I believe in yesterday.


모니터 속에 폴과 존, 해리슨, 그리고 링고가 앳된 모습으로 노래와 연주를 하고 있다. 지구가 붕괴되기도 전에 죽은 사람들. 사람들은 왜 지나간 것들을 그리움이란 코 없는 그물로 붙잡아 두려 할까. 결국 모두 빠져나가버릴 것을. 예전에 쓰던 이름 따위 지금 와서 추억해본들 무슨 소용이람. 난 매우 좋은 삶을 살고 있다. 안정된 직장, 안정된 보수, 안정된 인관관계. 더 이상 부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나는 내 삶이 훌륭하다고 평가해왔다. 허전한 건 없었다. 정말 없었다. 젠장, 누구나 다 허전한 구석은 하나씩 있지 않냐. 그걸 꼭 채워야 해? 그게 그렇게 의미 있냐고. 제길 이게 다 내일 케이시에게 들을 잔소리 때문이었다.


“뮤직 오프. 티비 온. 채널 07.”


재수없게도 뉴스.


“긴급속보입니다. 오늘 오후 6시 23분 경. 재생되고 있는 지구를 탐사하기 위해 출항한 우주선 프로미스호에서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아메리카시티의 로봇공학자로 알려진 아시모프 박사가 단독으로 지구에 접근하다 지구 방향에서 날아온 괴운석에 부딪혀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가슴이 폐점 시간의 셔터 마냥 차르륵 내려앉았다. 그 변태 박사는 왜 아무것도 없는 지구에 가려했을까. 아무튼 그리운 게 있는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목숨을 걸 일이 있다는 게 나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지구... 지구라. 나에게도 ‘지구의 추억’이 있었던가. 클레어가 아니라 ‘하정’의 추억.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 맞아. 나는 쓰지 않는 옷장 밑 서랍을 열었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뒤엉켜 있었다. 모두 내가 ‘하정’이란 이름을 쓸 때의 것들. 절대로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삼키고 있는 물건들. 나는 편지 한 장을 찾아냈다. 지구 붕괴 전 화성으로 출장 발령을 받았던 날 아침에 집으로 도착한 편지였다. 내가 화성에 도착하고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아 지구가 붕괴되어 그 편지는 ‘하정’이란 이름과 함께 서랍 속에 묻혔었다. 나는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오래된 먼지가 봉인이 풀린 혼령처럼 피어올랐다.



사랑하는 하정이에게


건강하지? 오랜만이야.

긴 말은 싫어하니까 짧게 전할게.


나 기타 치는 건 잠시 접고 취직하기로 했어.

지구에 있는 회사인데 내일부터 근무야.


나 너랑 헤어지고 많이 고민했는데...

역시 내게는 기타나 음악보다 네가 더 소중한 것 같아.


염치없는 말이지만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래,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라면 기적을 바랄 수도 있겠지?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에 우리 처음 만난 그곳에서 기다릴게.

아침부터 새벽까지 24시간 네 생각만 하면서.


사랑해 진심으로.


200X년 12월 21일

창헌이가



입 속으로 뜨겁고 짠 게 흘러들었다. 눈가를 자꾸 닦았다. 그래도 자꾸 흘러들었다. 어떻게 우는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울음소리가 나지 않는다. TV에서는 앵커가 또다시 격앙된 목소리로 긴급속보를 전해왔다.


“아시모프 박사의 유품이 발견되었답니다. 바로 이 사진입니다. 탐사대에서 E-mail로 지금 막 보내온 자료입니다. 사진 속의 여인은 로제티 스잔나 교수로, 아시다시피 ‘인공지능’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었습니다. 죽은 아시모프 박사는 그녀가 소장으로 있던 연구소 '비욘드 프런티어'의 마지막 연구원이자 연인이었다고 합니다. 스잔나 여사는 알려진 대로 전원이 희생된 제1차 지구붕괴조사단의 일원이었습니다. 아시모프 박사는 죽은 연인 스잔나 교수의 영혼을 따라...”


싫다. TV 속의 앵커는 여전히 하드보일드한 목소리로 낭만적인 채, 애도하는 채 하고 있었다. 눈물이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그때 XP-10T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XP-10T를 꼭 끌어안았다. 차가운 금속성의 느낌. 그래도 괜찮다. 사랑이란 말은 기억하고 있으니까.


“사랑해 스잔나...”


우웅. 소리와 함께 XP-10T의 몸에 온기가 감돌았다. XP-10T의 팔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포근하다. 그리고.


“사랑해 아시모프.”


로봇이 말했다. 스잔나의 목소리로. 어렴풋이 기억나는 지구붕괴조사단의 다큐멘터리, 거기서 들었던 그녀의 마지막 음성으로...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AI의 초보였던 아시모프는 그의 연인이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룬 것이었다. 모든 인공지능 과학자의 꿈과 같은 ‘사랑의 인공지능’을 아시모프는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창헌아... 여기는 눈이 안 오는데 어쩌니.......”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캐럴이 창 밖에서 들려왔다. 오른쪽 머리가 아파왔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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