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 우주
우주, 신비, 삶과 죽음, 종교...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던 K가 옛 1999년의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평행 우주란 거 알아?”
처음 듣는 말이었다.
“물리학 이론 중에 하나야. 아인슈타인 꺼든가? 세계는 다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단 거야. 봐, 지금 내가 이 동전을 던지면 앞이 나올까 뒤가 나올까?”
“글쎄에~ 앞?”
K는 동전을 던졌다. 뒤다.
“뒤. 자, 다시 던진다.”
이번에는 앞.
“이렇게 내가 단순히 동전을 던지는 것 속에도 두 가지의 미래가 있잖아. 앞이 나오는 미래와 뒤가 나오는 미래. 알겠어?”
“뭔 말이야? 한국어로 해 한국어로.”
“사람들은 흔히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역사를 바꾸고 싶다고 하지. 그런데 못 바꿔.”
“왜?”
“바꾸어지는 게 아니야. 하나의 미래가 더 생기는 거뿐. 그러니까 누군가가 1905년으로 날라가서 을사늑약을 못 맺게 한다면, 을사늑약을 안 맺은 미래가 하나 더 생기는 것뿐이지, 이미 늑약을 맺어버린 지금이 바뀌진 않는단 거야.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차원에선 내가 이미 교통사고 같은 것으로 죽어버린 미래도 있을 테고, 왜 나 예전에 교통사고로 죽을 뻔한 적 있잖아, 또 니가 대학에 떨어져서 재수하고 있을 차원도 있단 거지. 이 차원과 평행한 또 다른 차원에.”
“복잡하네. 그래서 요점이 뭐야?”
“인간은 무력하다는 거지. 운명이라는 홍수에, 거대한 절대자의 권력에 놀아나는 수밖에 없어. 노스트라다무스는 이 차원의 계획표를 알아버린 거고. 비극이지. 하지만 결국 인간은 다 죽게 되어 있어. 조금 앞 당겨지는 것뿐.”
“야! 너 아직도 거기 다니냐!? 그만둬 이제. 세계 종말 따위 일어날 리가 없잖아.”
“글쎄다... 세계 종말이 별건가. 인간은 모두 본원적인 종말을 가지고 살잖아. 그게 모두 한 순간에 집행되는 것뿐야. 모두가 죽는 건 비극이 아냐. 되려 나에겐 니가 혼자 죽는 것이 가장 두려운 세계 종말이야. 사람들은 소중한 걸 필요로 하고....... 모두 그런 불안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거지.”
옛 1999년에 K는 신의 계획표가 아닌 노스트라다무스의 계획표대로 종말을 맞이했다. 아니, 그마저도 신의 계획인지도 모른다. 신 따위 믿지 않지만. 그래, K의 말대로 이미 진행된 미래는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아예 과거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산다면? 나는 옛 1999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는 방법도 모르지만) 나는 새로운 1999년의 새로운 나로 환생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1999년의 내 곁에는 그녀가 있다.
그녀와의 사랑은 계절처럼 깊어 갔다. 초여름이 지나고 세계의 온도가 높아지는 만큼 우리 사랑의 온도도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녀와 나는 서울에서 두 발로 디딜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나는 새로 생겨난 인터넷과 도서관 연속간행물실의 잡지들 속에서 명승지와 유적지, 데이트 명소 등의 정보를 낚아내는 일에 하루를 바쳤다. 캠퍼스에서 우리는 1년 만에 해후한 견우직녀처럼 손을 꼭 잡고 시간표에 따라 강의실을 옮겨 다녔다. 서로 수업이 다른 경우에는 서로가 상대의 강의실로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통에 종종 다툼이 일기도 했다. (물론 지각은 기본이었다.) 주말이면 내가 선정해놓은 데이트 코스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하루를 나곤 했다. 누군가 내 옷을 살짝 건들기만 해도 달콤한 향이 흩날릴 것 같은 시기였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는 나를 사랑했다. 평행우주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주의 넓이만큼 펼쳐진 무수한 미래가,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억 개의 또 다른 차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수억 개의 미래가 아닌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수억 분의 일에 해당하는 이 차원에 있다. 그것은 기적이다. 언젠가 한 번 그녀는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어떻게 우산을 가지고 있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일기예보도, 하늘도, 누구도 비가 올 거라고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그녀는 무척 궁금해했다. 나는 말했다.
“그건 기적 혹은 운명이야.”
그녀는 까르르 웃었다. 그녀의 웃음도 나에게는 기적 혹은 운명이었다. 7월이 지났다. 방학, 그리고 8월이 왔다. 녹음이 짙어갔다. 여름의 푸르름이 극에 달했다. 그녀와 나는 푸른 바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