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들

예스터데이를 기다리며 3

오른손의 사랑

by 장명진

오른손의 사랑


옛 1999년의 그녀가 꿈꾸던 로맨틱한 고백은 이런 것이었다. 때는 비가 오는 날이다. 바람도 살며시 불면 좋다. 장소는 도시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 고백하는 남자의 두 손에는 청초한 카라꽃이 한 아름 들려 있다. 남자는 아무 말도 않고 꽃다발을 건넨다. 꽃다발 속에 수줍게 숨어 있는 조그만 엽서. 엽서에는 단 한 마디만 쓰여 있다. ‘사랑해도 될까요?’(사랑해요나 사랑합니다가 아닌 반드시 사랑해도 될까요? 여야 한다.)


그 말을 내가 들은 것은 가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이미 느끼한 선배와 사귀고 있는 중이었다. 느끼한 선배에게 어떤 식으로 고백을 받았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대해, 그녀는 그냥 학교 벤치에서 ‘사귀자’라는 말을 들었다고 답했다. 그녀의 소망과는 아무런 관련성도 찾을 수 없는 고백이었다. 나는 생각했었다. 그녀는 외로웠던 거라고. 그래서 누구라도 괜찮았던 게 아닐까 하고. 물론 그 생각에는 모순이 있었다. 그녀는 숱한 남자들의 멋있는 고백을 다 거절하고 가장 멋없는 고백을 한 느끼한 선배에게 간 것이었으니. 그러나 나는 그렇게 논리적으로 생각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새로운 1999년에 나와 그녀는 무척 친해져서 종종 만나 영화를 보거나, 전시회 같은 곳을 찾아다니곤 했다. 4월의 우산 작전이 주효했던 것이다. 운명의 여신은 나를 향해 슬쩍 미소 지었다. 5월이 가기 전에 고백을 하고 확실한 관계가 되어야지 싶었다. 옛 1999년에 그녀는 5월의 어느 날 느끼한 선배의 고백을 받았다. 새로운 1999년에는 K가 살아 있듯이 느끼한 선배도 존재했고, 그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는 사실도 변함없는 것 같았다. 종종 공강 시간에 과실에 와보면 느끼한 선배와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무슨 핑계든지 만들어서 그녀를 밖으로 유인하고는 했다. 새로운 1999년의 그녀는 느끼한 선배보다 나의 말을 더 잘 따랐다.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쁜 일이었다.


나는 꼼꼼히 일기예보를 살폈다. 이번 주 토요일이 길일이다. 토요일 저녁쯤에 비가 내리기 시작할 것이라는 기상청의 보고가 있었다. 도시의 야경이 한 눈에 보이는 곳이라면 역시 남산이다. 이것으로 시간과 장소는 결정. 나는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짰다. 그리고 그녀와 나는 드디어 함께 남산에 올랐다. 포근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날이었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한적한 등산로를 이용해 정산까지 걸어 올랐다.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케이블카라는 기계장치 안에서는 금지된 사랑일지라도 쉽사리 낭만적 분위기가 흐트러지고 마는 것이다. 차라리 힘겹더라도 등산로가 좋다. 등산로를 이용해 정상에 오르면 함께 고난을 이겨냈다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더구나 운동으로 인한 여린 심장박동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격정으로 미화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역시나 그녀와 나는 정상에 다다르자 깊은 동질감과 서로를 향한 여린 떨림을 감지했다.


한적한 벤치에 앉아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가수는 김동률과 박정현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나와 맞는 부분이 없었다. 나는 비틀즈와 라디오헤드를 좋아했다. 국적마저 전혀 달라 접점이라고는 없었다. 굳이 찾는다면 박정현이 라디오헤드를 좋아해 공연에서 Creep을 종종 부른다는 정도.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잠깐 전람회의 ‘꿈속에서’라는 노래에 감동받았던 기억을 간신히 떠올려 낸 나는 나도 김동률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김동률의 노래는 ‘꿈속에서’ 가 되었다. 기적처럼 그녀도 그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인생은 농담 같은 것이다.


그녀가 김동률의 팬이 된 경위를 말하는 사이 시계를 보았다. 곧 비가 온다. 툭툭투둑. 웬일인지 일기예보는 오늘따라 정확하다. 나는 미리 준비했던 우산을 꺼내어 폈다.


“우산 가져왔어?”

“아니... 오늘 비올 줄 몰랐는데...”


우산을 하나 더 꺼내 내밀었다.


“혹시나 해서.”

“우와... 고마워.”

“야경 더 잘 보이는 데로 가자. 저기 전망대.”

“그래애-.”


그녀와 나는 전망대에 올라섰다. 도시의 불빛이 빗물에 산란되어 수채물감처럼 번졌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네.”

“어, 나도 그 생각했는데.”


그녀는 정말 깜짝 놀랐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커진 눈에 자칫 빠져버릴 것 같아 힘겹게 균형을 잡았다. 아직이야 아직.


“저기, 잠깐만 기다려봐. 뭐 좀 마실 꺼 좀 사 올게.”

“아니, 괜찮은데.”


그녀의 만류를 아랑곳 않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미리 아침에 와서 카라꽃을 맡겨 놓은 까닭이다. 꽃다발이 보이지 않게 우산으로 가리고 그녀에게 접근한다. 꽃다발 속에 ‘사랑해도 될까요?’라고 쓴 엽서를 넣어둔 것은 물론이다.


“채은아...”

“어, 왔어?”


뒤돌아보는 그녀를 향해 성큼 꽃다발을 내민다. 깜짝 놀라는 그녀. 카라꽃 위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진다. 빗방울에 카라꽃이 툭툭 흔들리자, 꽃내음이 새벽 호수의 안개처럼 그녀와 나 사이에 흩어진다. 그녀는 꽃다발을 받아 든다. 어쩔 줄을 모른다. 이내 꽃다발 속의 엽서를 발견한다. 읽는다. 눈물이 어린다. 이때다.


“사랑해도... 될까... 요?”


더듬더듬 대사를 성공리에 말한 나. 그녀의 입매가 초승달 모양이 된다. 가슴에 달빛이 가득 차오른다. 만월이다.


“네에...”


수줍은 그녀의 음성. 모든 게 꿈이 아니다. 꿈이 아니다. 나는 되뇌었다. 떨어지는 모든 빗방울이 거리를 박차고 세차게 뛰어오르는 듯했다. 이건 세상의 감각이 아니다. 라고 생각될 정도의 벅찬 기쁨. 나는 어째서 1999년으로 돌아온 것일까? 이 순간이 그 해답이었다.


밤은 좀처럼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빠르게 깊어 갔다. 우리는 남산을 내려와야 했다. 우리는 우산을 하나만 쓰기로 했고, 나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왼손을 살며시 쥐었다. 내 오른손의 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그녀와 잠이 들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단지 사랑한다는 말을 끝없이 변주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빗방울은 그녀와 나의 재즈송을 밤새 반주해주었다. 무수한 빗물이 작은 수채구멍을 향해 모여들듯, 내 인생의 모든 순간들이 이날의 기적 속으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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