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들

예스터데이를 기다리며 2

4월의 숲과 바람과 햇살과 그녀

by 장명진

4월의 숲과 바람과 햇살과 그녀


내가 '다시' 1999년으로 온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나고 4월이었다. 봄은 햇살보다 빠르게 내 마음에 찾아들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4월의 어느 날, 우연히 찾아간 양재 시민의 숲에서 그녀를 만날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그녀는 그때처럼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벤치에, 햇살이 비끼는 자리를 살짝 비켜 앉아 있었다. 책을 읽고 있다. 나는 그 책의 제목을 알고 있다. 히무로 사에코의 <바다가 들린다>.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만든 명작 애니메이션 <바다가 들린다>의 원작인 베스트셀러 소설이다. 그녀는 일문과 지망으로 원어로 된 그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로 그 책의 번역을 하고 있기도 했다. 모두 그녀가 친구들과 하는 대화를 몰래 엿들어 알게 된 정보였다.


원시림의 나무처럼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터진 하늘이 보였다. 바람이 불자 잎사귀들 사이로 햇살이 별처럼 조잘조잘 빛났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쯤이다. 나는 오른손에 들린 우산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에 거대한 세계의 비밀이, 운명이 쥐어져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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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의 나는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1999년의 4월, 이 숲에서 그녀를 본 뒤부터 계속이었다. 그녀와 나는 같은 대학의 어문학부 1반 소속이었다. 허나 나는 딱히 그녀에게 말을 걸어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와 나는 서로 지망하는 과도 달라서 그녀에게 나는 전혀 주목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 역시 처음부터 그녀를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기의 꿈이 확고하고, 제법 예쁘기도 한 괜찮은 아이 정도로만 평가하고 이내 잊어버렸던 아이였을 따름이다.


하지만 4월의 숲과 바람과 햇살이 모든 것을 변화시켜 놓았다. 그녀는 만화영화 속의 변신소녀처럼 내 속에서 화려하게 변신했다. 4월 이후 나는 자주 가지도 않던 과방에 종종 얼굴을 내비치었다. 그녀는 공강 시간이면 늘 과방에서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 옆에서 괜히 쿨한 척 카뮈니, 조이스니 하는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 종종 그녀와 눈길이 부딪치기도 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나의 연기력이 나날이 늘어가서 언젠가부터는 그녀를 싫어하는 척까지 할 수 있었다. 무척 어려운 일이었지만.


내가 건조된 해바라기처럼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그녀는 반의 여러 남자들로부터 고백을 받고 거절하기를 반복하더니 결국 두 학번 위의 느끼한 얼굴의 선배와 연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묘하게 질투를 느낀다거나 좌절한다거나 하지도 않고 변함없이 그녀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은 변태적인 애정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그 ‘4월의 숲과 바람과 햇살과 그리고 그녀’ 가 좋았던 것이다. 그 순간의 반짝임이, 순간의 가슴 시림이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 순간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녀가 느끼한 선배의 손을 잡고 캠퍼스를 거니는 실사 영상은 시시때때로 내 눈 앞에서 상영되었다. 실시간이어서 멈추거나 뒤로 감거나 빨리 감거나 아무런 제어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종종 왼손으로 선배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나에게 인사를 하곤 했다. 그럴 때면 늘 나는 왼손에게 인사를 하고 마는 것이었다. 인사는 반가움의 표시이기 때문에 미소를 짓는 것을 빼놓을 수 없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일을 반복하며 나와 그녀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느끼한 선배가 유학을 떠난 것은 11월 말쯤이었다. 일본으로의 1년간 어학연수였다. 솔직히 나는 기뻤고 나에게 기회가 온 것이라 여겼다. 그녀가 선배와 사귀게 된 이후 줄였던 과방 방문횟수를 눈에 띄지 않도록 점차 늘려갔다. 물론 나는 여전히 침묵했고, 내 손에는 단테와 괴테, 두 ‘테’ 형제가 번갈아 쥐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과방에 나와 그녀 둘만이 남게 되었다. 내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있었을 때였다. 마침 마지막 구절을 읽던 참이었다.


‘라자베타, 이 사랑을 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선량하고 생산적인 사랑이랍니다. 동경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울한 질투와 아주 조금의 경멸과 완전하고도 순결한 천상적 행복감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갑자기 과방에 설원 같은 고요가 깔렸다.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읽어버린 것이다. 눈보라를 뚫고 애써 그녀가 목소리를 내었다.


“와, 너 목소리 좋다. 뭐야 그 책?”

“저기... 너 '좋아해'...”


‘좋아해’라는 세 음절의 소리는 외계의 언어처럼 쉽사리 소통되지 못했다. 공허한 소리가 과방의 정돈된 공기를 흩뜨려 놓았다. 그녀도, 나조차도 그 언어를 정확히 이해 못했다.


“음... 내가 잘 들은 건지 모르겠는데... 방금...”

“그래, 좋아한다고 했어!”


나는 왜 화를 내고 있는 걸까. 나는 나에게 묻고 있었다. 뜬금없이 신경질적 고백을 하고 있는 이 낯선 자는 누구인가. 중력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끌어당겼다. 그녀와 나는 잠시 후 과방에 K가 들어설 때까지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세계에 있었다. K가 들어오자 그녀는 과방을 나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곧 느끼한 선배를 보러 일본으로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나는 과방에 발길을 끊었다.


'옛' 1999년의 4월. 세 시경 갑작스레 소나기가 내렸다. 그녀는 비를 피하기 위해 숲 근처의 매점으로 뛰어갔고 거기서 우연히 느끼한 선배를 만났다. 그녀가 무용담처럼 늘 하던 이야기였다. 그녀의 이야기 속에 나는 없었다. 하지만 현실의 역사 속에는 내가 있었다. 그날 나는 하루종일이라도 괜찮을 각오로 그녀가 벤치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몰래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비가 왔다. 그녀가 황급히 책을 가방에 넣고 달리기 시작했다. 매점으로 향하는 그녀를 따라 나도 매점으로 달렸다. 그녀는 매점의 처마 밑에서 비를 그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 섰다. 좀 더 정확히는 그녀의 오른쪽에.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왼쪽에 서있던 느끼한 선배를 먼저 발견한 것이었다. 늘 왼손으로 느끼한 선배의 손을 잡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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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 오십구 분. 나는 우산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세 시. 하늘은 약속이라도 한 양 비를 퍼부었다. 그녀가 가방을 챙기며 서두른다. 나는 벤치로 뛴다. 재빠르게 우산을 펴서 그녀의 머리 위 하늘을 가린다. 심장의 진동이 우산까지 이어진다. 들키지 않으려 손아귀에 힘을 주어본다. 우산은 더욱 우줄우줄 흔들리는 것이다. 바보 같으니. 그녀가 속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내 쪽을 올려다본다.


“아... 고맙습니다.”

“아... 아니요 뭘. 갑자기 비가 많이 오네요.”


'새로운' 1999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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