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아닌 그녀
바닷가의 허름한 민박집에서 그녀와 함께 자면서 꿈을 꾸었다. 꿈 속에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나온다. 나는 공백한 하늘 빛의 그리움을 느낀다. 아득히 먼... 멀어져만 가는 느낌. "아, 저긴 영원히 닿을 수 없다."라는 느낌. 교복을 입고 학교로 간다. 1학년 3반 교실은 ㄱ 자 건물의 획끝에 있다. 두근거리며 교실의 문을 열자 익숙한 방이 하나 나온다. 그녀의 방이다. 아니, 내 방이다. 아니, 혹은 다른 사람의 방? 방바닥에 앉아 공상에 든다. 그립다. 자꾸만 무언가가 그립다. 책상 서랍을 열어본다. 사진 한 장이 있다. 고등학교적 친구들과 수학여행지에서 찍은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 그녀가 있다. 그녀를 보며 웃다가 갑자기 까닭 없는 허전함이 엄습해 눈물이 난다. 여기는 어디지? 이 방은 그녀의 방도, 나의 방도, 다른 사람의 방도 아니다. 방이 어둠에 먹힌다.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누구지? 그러나 나는 나를 볼 수가 없다. 사진 속의 그녀는 너무 행복해 보인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녀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이상한 꿈이라며 피식 웃고 말았다. 나도 대수롭지 않게 따라 웃었다. 우리 중 누구도 심각해지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는 바다에 와 있었으니까.
모래톱에 앉아 그녀는 바다를,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안 것인데 꿈에서 보았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내가 꿈에서 본 그녀는 옛 1999년의 그녀였다. 그녀와 그녀가 다르구나. 다르네... 속으로 되뇌었다.
“아... 바다가 들려... 정마알-”
소설 <바다가 들린다>를 빗댄 이야기였다. 1999년 여름, 그녀는 한창 그 소설을 번역 중이었다.
“번역은 다 끝냈어?”
“거의.”
“바다에 온 소감은 어때?”
“글쎄에, 예전에 혼자 오던 거완 많이 다르네.”
“예전? 고등학교 때?”
“아니...”
“그럼 언제?”
“그냥. 언제라기 보단... 그냥 외롭고 사랑이 슬플 때.”
“고등학교 때 짝사랑한 사람 있었구나? 그치?”
“하하 들켰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녀도 짝사랑을 했다니. 누구였을까 그 사람은. 그리고 그때 그녀의 마음은 지난 번 1999년의 내 마음과 닮아 있었겠지? 갑자기 그녀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좀 더 깊은 바다 속으로 잠수해드는 기분이 든 탓이었을까. 나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될 질문을 하고 있었다.
“저... 채은아.”
“응?”
“날 처음 좋아한 게 언제부터야?”
“그을쎄에~ 처음 만난 4월의 숲서부터?”
“그렇구나...”
"으음? 어째 별로 반응이 시원치 않네?"
"아냐, 아냐. 좀 쑥쓰러워서 그렇지."
왜일까. 처음부터 좋아했다는 그녀의 말이 반갑지 않은 것은. 만약 내가 신의 계획표를 미리 보지 않았다면 역시 그녀는 날 사랑하지 않았겠지... 심해로 내려가는 듯했던 내 마음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사실, 난 그때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뭐? 누구?”
“고등학교 때 짝사랑 말이야. 그 사람이 상우 오빠야. 글쎄에~ 정말 좋아한 건진 모르겠는데... 꽤 오래 동경했었어. 그치만 너를 만나고 마음이 변했어. 이게 진짜 사랑이구나 싶었어.”
'너를 만나고 마음이 변했어' 보다 '그 사람이 상우 오빠야'라는 말이 더 도드라지게 들렸다. '이게 진짜 사랑이구나 싶었어'는 제대로 인식되지도 않았다. 상우 오빠. 상우 선배. 권상우. 그 느끼한 선배의 이름이다. 유명 배우의 이름과 똑같아서 분명히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름. 문득, 멀리서 느끼한 선배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상우 오빠!' 라고 외치며 달려가던 옛 1999년의 그녀가 떠올랐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모든 게 허망하고 부끄럽게 여겨져 눈가가 젖어들었다. 그 또한 부끄러운 일이었다.
“왜 그래 너? 무슨 일 있어? 아냐, 나 이제 그 오빠 안 좋아해. 사실 정말 좋아한 건지도 모르겠고. 그래, 별로야 그 오빠 이제. 미안.”
“아냐... 아냐... 아직 잠이 덜 깨서... 하품이 나서 그런 거야.”
현상과 너무 동떨어진 변명인 줄 알면서도 둘러댔다. 그녀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옛 1999년의 그녀는 언뜻언뜻 내게 미소 지어준 적은 있었지만, 나를 위해 슬퍼해준 적은 없었다. 누군가가 그랬던가. 나를 위해 슬퍼해주는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그녀는 나를 위해 슬퍼해주었다. 그점이 나는 더 슬펐다. 나는 알아버렸다. 그녀는 그녀가 아니다. 나를 사랑하는 그녀는 더 이상 그녀가 아니었다.
수평선으로부터 낮은 담을 만들며 파도가 밀려왔다. 파도가 만든 담은 하얗게 부서지기를 반복했지만 곧 다시 만들어지는 일도 반복되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담이었다. 바람이 한 점 불어와 나의 코끝과 그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건드렸다. 바람이 세계를 떠돌다 실수로 일찍 시베리아의 기운을 주워 왔는지, 여름바람 치고는 시큰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 세계의 온도도 영원히 상승할 수만은 없나보다. 그렇게 되면 K의 꿈이 실현되어버리겠지. 차라리 그것도 좋다. 초여름을 지나서 중여름, 중여름을 지나서 종여름. 종여름이 되면 세계의 온도가 일제히 20도 이상 상승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파도는 더 이상 담 같은 것을 쌓지 않고 육지를 향해 돌진해 오겠지. 나는 그 최후의 순간에도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는 누구인가. 옛 1999년의 그녀인가. 지금의 그녀인가. 왠지 서글퍼서 웃음이 났다.
“야아~ 울다 웃음 엉덩이에 털 나-”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친절하게 따라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