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우릴 헤어지게 해
모든 게 우릴 헤어지게 해
바다 여행 이후 더욱 깊어질 줄 알았던 그녀와 나의 사이는 오히려 조금 멀어졌다. 그것은 그녀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갈 때 그녀가 내 귀에 꽂아주었던 이어폰에서 주로 박정현의 노래가 나왔기 때문이기도 했고, 함께 간 노래방에서 내가 종종 그녀가 좋아하지 않는 록 장르의 비틀즈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기도 했다. 혹은 그녀가 에스컬레이터 계단 왼편으로 재빠르게 올라가는 동안, 나는 종종 계단 오른편에 얌전히 서서 반대 편 에스컬레이터에 탄 사람들을 구경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루시드폴의 ‘나의 하류를 지나’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모든 게 우릴 헤어지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여름은 바다의 썰물처럼 멀어져 갔다. 하늘은 점점 키가 자랐다. 거리의 온도는 그녀와 나 사이의 온도와 동반 하락했다. 자정이면 매일 전화를 하던 우리는 점점 우리가 알고 있는 국어의 어휘가 다채롭지 못함을 원망하게 되었다. 유일하게 공통으로 즐겨보던 쇼 프로그램마저 가을 개편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자 우리의 대화는 서로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축사로 수놓아지게 되었다. 그러던 나날의 가운데 우리의 시한폭탄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상우 오빠가 사귀재.”
그녀와 나는 4월의 숲 벤치에 앉아 새로 나온 김동률의 신보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오른쪽 귀를 막고 있는 이어폰을 뽑았다.
“어?”
“니가 맨날 느끼하다던 그 오빠가 나보고 사귀자고 했다니까!”
그녀는 화가 난듯한 표정으로 내 눈을 똑바로 노려보는 것이었다. 아니, 누가 화를 내야 할 일인가. 헛웃음이 나왔다.
“하!”
“그게 웃기니?”
“그럼 안 웃겨?”
“퍽도 웃기겠다. 난 고민돼 죽겠는데.”
“고민? 무슨 고민?!”
“무슨 고민이라니. 그냥 고민이지.”
“그게 무슨 고민이 돼!”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마치 그녀 곁에 느끼한 선배가 앉아서 태연하게 담배를 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 같은 건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됐어.”
“뭐가 돼?!”
이상하게 점점 더 마음이 오그라들고 초조해졌다.
“넌 제발 그러지 좀 마아.”
“내가 뭘?”
“너 그 오빠 얘기만 나오면 목소리 바뀌는 거 몰라?”
그랬던가. 의식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랬을 수 있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그녀 옆의 느끼한 선배가 나를 흘긋 보며 피식 비웃는 것 같았다. 이제는 그것이 내가 만들어낸 환영인지 실제인지 분간하기도 어렵다. 그녀는 아마도 내게 보내는 마지막 구조신호였을 말을 애원하듯이 건넸다.
“내가 얘기했잖아. 진짜 많이 얘기했어 정말. 아니라고 아니라고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근데도 넌 계속 계속... 이것 봐 지금도 나 의심하지? 이제 정말 힘들어 지쳤어...”
그녀는 분명 마지막으로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느끼한 선배는 짐짓 어른스러운 척 그녀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태도다. 나는 그녀처럼 솔직하지도, 느끼한 선배만큼 어른스럽지도 못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외면하며 차갑게 말했다.
“그럼 사귀든가.”
“뭐어?!”
“그 새끼랑 사귀라고 그럼!”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내려다보던 그 경멸 어린 눈빛을 잊지 못한다. 나를 노려보는 그녀의 눈빛은 마지막 불꽃을 내며 타오르다가 차츰 사그라들어 재가되어갔다. 그녀의 눈빛이 재가되었을 때 나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숙여 관계의 종언을 인정했다. 10월이었다. 우리는 거의 한 달만에 만난 참이었다. 만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게 되었다. 그녀는 4월의 숲을 떠났고, 나는 남았다. 찬 바람이 불었다. 빈자리에 낙엽이 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