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때 뜨거웠을 뿐
우리는 그 후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종종 그녀가 느끼한 선배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다. 편의점의 아이스크림 박스 앞에서, 길을 걷다 우연히 돌아본 노래방의 입구에서, 빈 곳을 찾아 들어간 강의실의 저 귀퉁이에서. 아니, 그건 꿈이었다. 아니, 그건 현실이었다. 아니, 보다 더 현실인 것은 내가 가의 매일 K와 술잔을 부딪쳤다는 것일 테지만. 한때 지구온난화를 걱정했던 나와 그녀 사이 사랑의 온도는 이제 빙하기의 재래를 우려하게 되었다.
“니가 무슨 사랑을 알아! 하하하.”
“글쎄, 너보단 내가 좀 더 알 것 같은데...?”
술이 잔뜩 취한 밤 나는 K를 향해 소리치며 웃었다. 같은 과 친구로부터 그녀가 느끼한 선배와 심야 열차를 타는 걸 보았다는 첩보를 들은 밤이었다. 나는 애꿎은 K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그럼에도 K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크크큭. 니가 무슨 사랑을 아냐? 너 연애 안 해봤잖아! 그 뭐냐 아무나 할 수 있는 짝사랑도 안 해봤잖아~."
만취한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말을 거의 남의 말처럼 다시 듣고 있었다. 내가 말한다기 보다는 입에서 말이 풀려나오는 수준이었다.
"짝사랑이라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냐."
갑자기 술이 확 깼다.
"어? 어? 너도 짝사랑을 아네? 헤헤. 짝사랑을 알아. 난 말야. 걜 1년 넘게 좋아했어~. 알아? 1년 넘게 좋아했다고."
"1년이라고... 그래 긴 시간이네..."
K는 묘한 표정으로 맥주잔 속의 황금빛 액체를 들여다봤다. 그 속에 귀중한 것을 숨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무엇이 들었을까. 문득 그 속에 들어가보고 싶었다. 술에 취한 탓이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그때 K가 말했다. 어지러운 가운데 환청처럼 목소리가 흐트러져 들려왔다.
"사랑이란 게 산수 같은 거면 참 좋을 텐데... 그치? 누군갈 사랑한 시간에 비례해서 사랑을 받은 사람의 애정도도 함께 상승한다면 말이야. 그런 간단한 산수면 참 좋겠지... 안 그러니? 이 세상은 모든 게 하나같이 너무 복잡해서 문제야. 그래서 싹 지워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만들어지는 거겠지."
K는 나에게 하는 말도, 맥주 속의 무언가에게 하는 말도 아닌 자기만의 말을 허공에 뿌려놓았다. 한동안 그 말의 입자들이 뻐끔뻐끔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야, 그냥 나도 너 따라 거기 나갈까? 노트르담말이야."
"노스트라다무스겠지."
"그래 그거. 얼마 남았댔지. 세계 멸망까지."
"지금이 10월이니까, 2개월."
"뉴스 보니까 7월이었다고 하던데?"
"7월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1999년 저녁 7시 7분 7초라는 설을 난 믿고 있어."
"그것도 복잡하구나 뭐가."
"그러고 보니..."
"체- 세상에 쉬운 게 하나도 없냐. 세상에 뭘 쓰는 것도, 지우는 것도."
나는 갑자기 뜬금없이 노래가 부르고 싶어 져서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사랑을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거의 인사불성이 된 나를 대신해 K가 휴대폰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내 귀속으로 전화가 걸려온 것처럼 K의 목소리와 휴대폰 저편의 목소리가 서로 뒤섞여 내 귀에 걸렸다. 저편의 목소리는 그녀다. 둘 중 누군가의, 아니면 두 사람 모두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니가 끝까지 책임을 지던가! 아니면 마무리를 제대로 하란 말이야!". 그건 분명 K 쪽의 목소리였다. 그 대사를 마지막으로 통화는 끝이 난 것 같았다. K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새벽 바다의 갈매기 소리처럼 아련하게 들려왔다. 일어나서 배웅을 하려고 했지만 의지와는 반대로 눈이 스르륵 감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옆 자리에 앉는 기척에 깜박 눈을 떴다. 머리에 익숙한 온기가 번진다.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 나는 꿈결에 그 손을 끌어다 잡았다. 그리고 손에 이끌려 반짝이는 거리를 걸어가 포근한 침대 위에 누웠다.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이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우리는 키스를 했고 그날 밤을 함께 보냈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다시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주 뒤 우리는 다시 헤어졌다. 내가 노래방에서 라디오헤드의 크립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휴대폰에 느끼한 선배의 전화번호가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을이 되면 함께 보러 가기로 했던 공연을 두 사람 다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니, 다시 모든 게 우릴 헤어지게 했기 때문이었다. 11월, 입동을 지나며 1999년의 가을은 영원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