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나요? 잊혀진 계절을
기억하나요? 잊혀진 계절을
당신은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나는 1999년을 한 번 더 살았다. 그녀와 헤어진 늦은 가을까지의 일들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뇌와 연결할 수 있는 동영상 플레이어가 있다면 모든 일들을 당신 눈앞에 재생해 보일 수도 있으리라. 그녀와 헤어진 가을 이후의 일들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11월 말이 되자 학기를 마친 느끼한 선배는 일본으로 1년 간의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의 곁에는 그녀도 함께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새로운 1999년의 나는 과방에서 <토니오 크뢰거>를 읽으며 그녀가 들어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간의 나는 <토니오 크뢰거>의 단 한 문장도 읽지 않았다.
그녀와 헤어진 후 나는 매일매일 그녀에 대한 생각을 했다. 머리로는 그녀와 나는 맞지 않는 사이였다는 것을 계속 증명해야 했고, 가슴으로는 그녀와 내가 얼마나 이상적인 연인이었던가 되뇌며 쉴 새 없이 감동해야 했다. 이 증명과 감동 사이의 복도를 뛰어다니며 분주하게 긴 마음의 겨울을 준비했다. 빙하기가 올 것이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어둠의 제왕과 불의 날이 올 것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기나긴 빙하기가 올 것이었다. 아, 큰 불이 일고 나면 결국 빙하기가 오는 것인가.
K의 말처럼 그때 내게는 종말이 왔다. 그리고 나는 그 종말에 휩싸여 옛 1999년 12월의 일을 까맣게 잊고 만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그녀 때문에 시간을 거슬러 왔다고 믿고 있었다. 사람이란 그렇게 어리석다. 다시 K의 말이 떠오른다. 굳이 아인슈타인의 평행우주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무력한 것이다. 다시 기회가 주어져도 어리석은 자는 그것이 기회인지 조차 알지 못한 채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고, 사람의 역사는 결국 크게 바뀌지 않는다. 당신은 기억하는가. 잊혀진 계절을.
새로운 1999년의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이브. 버스가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K가 버스 유리창 저편에서 내게 손을 흔든다. 우리는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보냈다. 아주 즉흥적인 만남이었다. 먼저 연락한 것은 나였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내게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을 들게 하는 사람은 K밖에 없었고, K에게도 그런 것 같았다. 버스는 교통 체증으로 인해 서서히 움직여 간다. K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K는 멋쩍게 미소를 짓고 있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다. 그러나 끝내 K를 향해 손을 흔들지도, 충분하게 미소를 보이지도 않았다. 서서히 교통체증이 풀리며 버스가 점점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해명하느라 뇌세포들은 분주했다. 나는 표정을 그리지 못한 눈사람처럼 서서 K를 배웅했다. 우리는 이제 두 번 다시 예전처럼 만날 수 없으리라.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우리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을 함께 보냈다. 일본으로 떠난 그녀와 종종 가던 모텔에서. 분명 우리는 술을 많이 마셨다. K는 원래 술을 즐기는 친구가 아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어쩐지 우리는 과하게 술을 마셨다. K는 마음먹은 바가 있었다. 취기가 충분히 올랐을 무렵 불현듯 K가 말했다.
"좋아해. 아니, 사랑해. 그런 것 같아. 나 이제 못 속이겠어."
K의 말을 분명히 기억한다. 하지만 말을 들을 수 있을 뿐 이미 내 사고 회로는 알코올 속에 빠져 고장 나 있었다. 나는 꼬부라진 혀로 웃기지 말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유치하고 더러운 말을 내뱉었다.
"증명해봐 그럼."
술에 취해 장난을 거는 척 말하고 있었지만, 그때 마음속에 일렁이던 욕정의 파도가 내 몸의 어딘가를 슬쩍 건드리는 듯했던 느낌을 또렷이 기억한다. 뚜껑이 닫힌 캄캄한 우물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누군가 슬쩍 뚜껑을 건드린다. 미세하게 벌어진 틈으로 별빛과 같은 한 줌의 빛이 스며든다. K와 호프집에서 나와 그녀와 가던 모텔에 들어서고,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았을 때 나는 분명 그런 기분이 들었다. 단 한 번도 여자로,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K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우물의 뚜껑을 슬쩍 건드리고 가준 구원의 당신은 대체 누구신가요.
하지만 아침이 밝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물의 뚜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다.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덕분에 감춰져 있던 우물 벽의 사다리가 드러나고, 나는 침착하게 우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밖으로 나와 우물 안을 보니 이번에는 K가 그 속에 있었다. 나는 옆자리에 잠들어 있는 K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보며 그런 장면을 떠올렸다. 혼자 하는 사랑은 스스로 우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스스로 들어갔으면서도 상대가 그곳에 자기를 밀어 넣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걸어 나올 수도 있는데 그 방법을 잊어버리고 만다. 나는 K로 인해 우물 속에서 나왔다. 하지만 사랑인가, 사랑이 아닌가.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망설이며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우물을 두고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와 옷을 챙겨 입었다.
"같이 나가자..."
K가 눈을 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 앉아 K가 옷을 입는 걸 기다렸다. 사스락 소리가 들릴 때마다 K의 옷이 내 살갗을 스치는 듯했다. 가라앉아 있던 지난밤의 일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K는 나를 허락하기 전에 물었다.
"너도 날 사랑하지? 그렇지?"
나는 대답했다.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