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들

예스터데이를 기다리며 9

'정말' 사랑하는가?

by 장명진

'정말' 사랑하는가?



"너도 날 사랑하지? 그렇지?"


나는 대답했다.


"사랑해."


하지만 하루 만에 마음은 달라져 있었다. 아니, 어쩌면 어젯밤 단 한 순간만 내 마음은 다른 가면을 쓴 것인지도 몰랐다. 그도 아니라면 K와 입을 맞추고, 몸을 이었던 그 1시간 남짓의 순간 동안에만 나는 진심으로 사랑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사랑하는가? 다시 물었을 때 나는 전혀 자신이 없었다. 개새끼. 나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전했다. K와 나는 어색하게 모텔을 빠져나왔다.


이른 아침,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 도리라는 측면에서 사귀자고 말하는 건 오히려 더 상대를 모욕하는 게 아닐까. 죄인처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Y야 고개를 들어. 그리고 날 봐줬으면 좋겠어. 그래야만 내가 조금 덜 비참할 것 같거든."


K가 먼저 말했다. 그래도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미안해..."


내가 말했다. K의 표정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낡은 구두코 앞으로 붉은 빛깔의 벌레 한 마리가 지나갔다. 어떤 벌레일까. 모르는 종류의 벌레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해버렸기에 돌이킬 수 없었고 나는 문득 K가 말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오늘 이루어지면 어떨까 싶었다. K는 오래 침묵했다.


"나랑 사귀자. 응? 내가 싫은 건 아니잖아."


나는 어느 쪽 질문에 먼저 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다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아버렸다. K는 당연히 자신과 사귈 수도 없고, 심지어 싫은 면도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K의 마음까지 살필 정도의 인간이 되지 못했다. 1년을 더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Y야..."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K의 얼굴을 마주했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숙인 내 시선 앞으로 K의 작은 손이 불쑥 나타났다.


"악수하자... 마지막으로."


얼떨결에 K의 손을 마주 잡았다. 따스했다. 그때 정류장 뒤편의 편의점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비틀즈. 예스터데이.


어제, 나의 모든 괴로움은 사라진 것 같았지요
그러나 지금 그 괴로움 다시 오는 것 같아요
오, 난 어제를 믿어요


버스가 도착했다.


"갈게."


K는 비틀즈의 노래를 채 다 듣지 못한 채 버스에 올랐고, 나는 정류장에 노래가 끝날 때까지 남아 K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손을 흔들던 K가 쓸쓸하게 손을 내리는 모습을, 내게서 시선을 떼고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게 되는 것을 바라봤다.


‘예뻤구나...’


나는 처음으로 K를 이성으로 인식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라나면서 벽과 벽에 걸려 있는 액자를 구분해내듯이. 그렇다면 나는 그전의 나로부터 조금쯤 자라난 것일까. 집으로 돌아와 긴 잠에 빠졌다. 그대로 새로운 1999년도 빨리 흘러가버렸으면 싶었다.


K에게 다시 전화가 온 것은 12월 31일 밤 11시경이었다. 김동률의 노래 ‘벽’의 멜로디가 휴대폰 신호음으로 반복됐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벽 저편의 누군가가 내게 보내는 구조요청 신호처럼 들렸다. 그럼에도 난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왜? 나도 내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삑! 휴대폰에 음성메시지 등록을 알리는 문자가 들어왔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Y야. 내가 널 언제부터 좋아한 걸까. 우리가 학교 앞 음반가게서 처음 마주쳤을 때? 그래, 그때 우리 둘 다 카니발 씨디를 들고 있었잖아. 그때가 3월이었지? 입학하고 3일인가 이틀인가 그쯤 지났을 때. 아니다, 입학식 때의 너도 쫌 귀여웠던 것 같아. 기억하니 내가 바로 니 뒤에 있었고, 떨어진 내 모자를 니가 주워 줬었어. 바보 같아, 널 먼저 좋아한 건 난데... 사람을 사랑한 시간으로 1년이란 시간은 긴 걸까 짧은 걸까. 그 이상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아직 모르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경험해보지 못하겠지... 오늘이 세계 종말의 날이구나. 고백하자면... 널 알게 되고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사랑하게 된 후부턴 세계 종말이 오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게 됐어. 제발 제발 오지 말라고. 나는 어릴 적부터 어딘가 항상 세상에 지쳐 있어서 말이야. 항상 모든 게 끝나기를 바랬던 것 같아. 예언이 이루어질까. 이제 신앙 같은 건 중요하지 않게 됐지만. Y야, 건강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꼭 행복해져야 해. 안녕. - 메시지가 끝났습니다.”


다음 날 새로운 2000년 1월 1일, 아침 뉴스 속보는 변하지 않았다. K의 죽음을 보도하는 기자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K는 종교적 신념을 위해 순교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K의 죽음을 비웃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1월 2일도, 그다음 날과 다음 달과 그다음 달에도. 나는 웃지 못했다. 정말 사랑하는가라고 묻지 말았어야 했다. 그저 사랑하는가라고 물었어야 했다. 사랑에는 정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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