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터데이를 기다리며
아무도 K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직 나만이 알 수 있었다.
나는 또다시 1년을 기다렸다. 2000년 12월 31일이었다. 나는 버스를 기다렸고, 술에 취한 채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1999년 1월 1일에 깨어났던 것이다. 다시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1999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타임슬립의 시간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나는 K의 죽음을 인지한 새 2000년 1월 2일부터 매일매일 그곳에 갔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떠나보냈던 편의점 앞의 정류장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이 되도록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는 예스터데이는커녕 올드 팝송의 전주음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생은 두어 달이 지나면 바뀌곤 했다. 아르바이트생의 문제는 아니었다. 항상 똑같은 라디오 주파수의 방송들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몇 번인가 '예스터데이'를 신청곡으로 사연을 보내 보았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의 기적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왠지 빠르게 늙어갔다.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었고, 이마에 선명한 주름이 보이기 시작해 앞 머리를 내리고 다녔다. 병에 걸린 것은 아니었다. 의사는 스트레스를 주의하라고 조언했다. 나는 비틀즈 매니아가 되었다. 방에는 항상 비틀즈의 음악이 흘렀다. 무작위로 재생되는 비틀즈의 노래를 들으며 방바닥에 퍼더버리고 누워, 벽 여기저기에 붙여 놓은 K의 사진을 올려다보는 게 내 하루의 마지막 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러고 있으면 마치 내가 아직 1999년의 어느 순간에 있고, K가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가을 즈음이었던가. 일본에서 돌아온 4월의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K의 소식을 이제야 들었다는 말을 듣고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내 가슴에 그녀에 대한 적의가 휘몰아치는 걸 느꼈다. 인간이란 건 참 이상한 생물이구나 싶어 한참을 웃어버렸다. 10월부터는 하루에 밥을 한 끼씩만 먹게 되었다. 한 끼를 꼭 챙겨 먹는다는 것보다는 먹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기 때문에 먹는다는 의미가 컸다. 시간을 견디는 일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모두 그만뒀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12월 31일이 아니라면 버스정류장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라면 한 박스를 방에 두고 11월과 12월을 보냈다. 시간여행에 대한 책들을 쌓아놓고 읽었다. 모두 저 마다 말이 달랐다. 나와 같은 경우를 기록한 책은 없었다. 나는 꿈을 꾼 게 아니었다. 멍하니 손금을 들여다보는 일이 늘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날이 추워졌고 이불속에서 웅크린 채 잠을 잤다. 나는 꿈을 꾸지 않았다. 그 때문에 현실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내가 지내는 현실을 현실이라고 구분 지어줄 수 있는 반대의 것이 없었다. 살이 빠졌다. 머리카락이 빠졌다. 약지 발톱이 빠졌다.
드디어 새 2000년의 12월 31일이 되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K'
천정에 네임펜으로 쓴 문장을 보며 눈을 떴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가슴이 계속 뛰었다. 몸이 떨렸고,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불속에서 간신히 기어나와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내려선 안 된다. 지난 2000년 12월 31일에 눈을 보았던 기억은 없었다. 기상청에 전화를 걸어 눈이 언제까지 오느냐고 물었다. 내일 오후까지 내릴 것 같다는 기상청 직원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눈을 당장 멈추라고 소리를 질렀다. 전화가 끊어졌다. 눈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내렸다. 쌓이기 시작한 눈길 위를 자박자박 걸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K와 걸어 다녔던 길들에 발자국을 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다시 내린 눈에 발자국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히 무언가를 남긴 것 같은데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는 점이 인생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니 정신이 맑아졌다. 하얀 눈이 푸르게 물들기 시작했다. 밤이 내려왔다.
편의점에서 맥주 세 캔을 사 와서 연거푸 마셨다. 정류장의 벤치에 앉았다. 비상 체인을 단 차들이 힘겹게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한참을 있어도 버스가 오지 않자 사람들이 모두 정류장을 떠났다. 취기가 올라 눈 앞이 흐려졌다. 불빛들이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아, 그리고 예스터데이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환청이 아니다. 분명 편의점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도착한 버스가 문을 열었다가 빈 겨울 공기만 태우고 지나갔다. 1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가 나에게 손을 흔든다. 그녀의 미소.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온기. 잊지 않으려고 계속 그녀를 불러냈다. 그녀의 환영이 이윽고 허공 속에 나타났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지나가는 버스를 향해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비명처럼 외쳤다. 내리라고! 내리라고!
그 뒤 내가 어떻게 집으로 돌아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나는 변함없이 내 자취방에서 깨어났고 볕은 여느 때처럼 희미하게 방에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한 가지 기이한 일을 말하자면 2000년에 잠든 나는 1999년에 깨어난 것이다. 나 역시 믿기지 않았지만 K와 전화통화를 하고 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도무지 정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나는 다시 주어진 1년을 군말 없이 살아보기로 한다.
내가 1999년으로 돌아온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나 4월이 되었다. 봄은 햇살보다 빠르게 내 마음에 찾아들었다. 나는 양재 시민의 숲으로 향했다. 우산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 End
2016. 5. 29.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