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들

우편배달부의 나무

꽁트 no. 1

by 장명진

그남도 몰래 나무 한 그루가 희붐히 피었다. 나무의 머리카락은 머다래서 올려다보면 먼 우주 별자리의 신화들이 밤마다 가지에 앉았다. 그남의 나무를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다만 그남 혼자만이 조그맣게 열린 창으로 나무를 바라보곤 하는 것이다. 여름이어서인지 한 차례 비가 올 때마다 나무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꼭 그남이 바라보는 우주를 다 덮어버릴 기세로.


그남은 아침에 일어나면 제복을 입고 우체국으로 향하는 이였다. 요즘은 이메일이 활성화된 까닭에 우편업무가 줄긴 했지만, 그래도 그남이 일하는 곳은 바쁜 편이었다. 그남의 일은 편지를 각각의 주소로 배달하는 일이다. 가끔 엉뚱한 주소로 편지가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제 주인을 찾아갔다. 사람들에게는 그 마음속에 저마다의 주소가 있어서, 사실 편지는 어떤 집으로 배달되는 것이 아니라 받는 이의 마음의 주소로 배달되는 거라고 그남은 생각했다. 깜박 편지를 잃어버려도 마음 주소에 도착한 편지는 고이 남겠지.


찌르릉 소리를 내며 그남의 자전거는 오늘도 그리운 마음의 주소를 향해 달리고 있다. 저녁이 되면 고단한 몸을 이끌고 그남이 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뒤편으로는 해가 저물고, 그남의 집은 짙은 주홍빛으로 물든다. 문을 열면 그 주홍빛이 덥석 방안까지 들어섰다. 그렇게 모든 아쉬움은, 그리움은 덥석 덥석 가슴 한 복판까지 뛰어들어오기 일쑤였다.


방 안에 들어와 무심코 TV를 켜면,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얼굴들, 목소리들. 그남은 안도의 한숨인지를 내쉬며 등 베개에 풀썩 기대어버렸다. 여름밤은 너무도 긴 것 같아. 그남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루하루 자라나는 나무가 창 안으로 들어올 시원한 바람들을 떡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저걸 베어버려야 할 텐데... 그남은 매일 밤 뒤척이며 매일 밤 같은 다짐을 해보는 것이다.


그녀에게 보낸 편지는 그남의 우체국으로 매일 되돌아왔다. 그남은 늘 자기가 쓴 편지들을 자신의 주소로 다시 배달해야 했다. 그남이 쓴 편지들은 그녀의 집에 닿았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기를 벌써 5년. 그남이 그녀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은 5년 전 그남이 군대를 가고 부대를 배치받은 후부터였다. 그남과 그녀는 이미 양가의 반대로 헤어진 뒤였다. 그녀는 부모님의 강권으로 다른 이를 만나고 있었지만, 그남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에게 꾸준히 편지를 쓴 것이었다. 물론 그남의 편지는 언제나 그남의 부대로 되돌아 왔다. 그녀가 이사 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남은 바보처럼 계속 같은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언젠가는 닿을 거야. 하지만 그남이 제대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가 어느 유수한 사업가와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도 그남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올 편지를 보냈다. 오히려 그남에게 돌아오기에 안심하고 보낼 수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그남의 긴 여름밤은 계속되고, 그남의 나무도 끊임없이 자라 그남의 창 안까지 가지가 뻗어올 즈음. 그남은 같은 우체국에서 일하던 사무원과 혼약을 맺게 되었다. 새 신부를 맞기 위해 그남은 집을 정리했다. 청소를 끝내고 남은 건 오랜 세월 간직했던 편지들과, 그남을 숨 막히게 했던 창 밖의 나무. 아니, 이제 그남의 집과 가지와 뿌리로 이어져버린 그 나무뿐. 그남은 내일 모든 것을 정리하리라 마음먹고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꿈속에서는 어느 새 그녀 대신 우체국 사무원이 등장했다. 삶은 가볍게 흘러갔다.


찌르릉 자전거 소리가 저녁놀과 뒤섞이고, 그남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남의 손에는 편지가 들려있지 않은 것이다. 오늘 그남은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남은 방 안으로 들어와 낡은 서랍 속의 편지들을 꺼내 이제는 버려야 할 자기의 마음들을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깊디깊은 여름밤이 함박눈처럼 소복소복 쌓여갔다. 편지를 다 읽은 그남은 조용히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남의 나무를 향해 손을 뻗어 보듬어 보았다. 그랬더니 나무는 반딧불이 마냥 영롱한 비취빛으로 반짝거리더니, 까무룩 그녀의 미소로 변해 멀리 밤하늘로 날아가 별이 되는 것이었다.


꿈이었을까. 아주 오랜만에 세상의 바람이 그남의 얼굴을 향해 불어왔다. 하지만 그 바람은 왜 그렇게 시리고, 무표정했던지. 그 후로 그남은 사무원과 결혼식을 치렀고, 승진도 해서 이제는 조그만 마을의 우체국 국장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왠지 그남이 변한 것 같다고 수근거리곤 했다.


오랜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그 사랑을 잃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 혹은 그 사랑과 함께했던 삶을 잃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젠 아주 오래전, 그남이 마지막으로 그남이었던 여름밤. 그남이 읽었던 편지들, 그 끝 귀퉁이에는 그녀의 글씨가 조그맣게 적혀 있었다. 한결같은 목소리로.


"사랑에게."


편지가 배달되는 곳은 그 사람의 마음의 주소. 사람들은 자주 그 사실을 잊고, 서로 바라보며 그리워한다. 사랑은 세상의 바람을 막아주는 삶의 나무. 사람들은 너무 큰 사랑에 숨 막혀하기도 한다.


2001. 9. 2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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